철학/철학자

[철학자] 갈릴레이

cbc 2023. 5. 30. 02:50

 

1633년 6월 22일 로마의 종교재판소. 일흔의 노인이 신성모독죄라는 엄청난 죄목으로 재판정에 선다.

노인은 고문과 화형의 위협 앞에서 결국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 기존의 지구중심이론이 옳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끝내 과학자의 양심을 저버리지 못했던 그는 재판정을 나서면서 지금까지도 널리 회자되는 한마디를 남겼다고 한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이제는 신화가 되어버린 갈릴레이의 일화다. 그런데 정말 갈릴레이가 이런 말을 했냐고? 사실은 모두 꾸며진 이야기다.

하지만 이후의 행적을 보면 갈릴레이가 온갖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과학자로서의 책무를 다했음을 알 수 있다.

과학의 순교자이자 근대적 이성의 상징이었던 갈릴레이. 수많은 전설로 포장된 갈릴레이의 드라마틱한 학문적 여정 속으로 들어가보자.

 

 

전설을 한 보따리 몰고 다닌 남자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564년 피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수도원에서 공부했고 사제의 꿈도 가졌다.

아버지는 아들을 의사로 키우기 위해 피사 의대에 입학시켰다.

그런데 청년은 주입식 암기 교육이 싫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라면 무조건 외우고 보는 스콜라적 수업 분위기가 싫었다.

결국 그는 의대를 중퇴했다. 혼자 수학을 공부하여 28세의 나이에 피사 대학교의 수학 교수가 되었다.

1592년에는 파도바 대학교로 옮겨가 기하학과 역학을 가르쳤다.

 

그는 망원경을 만들어 천체를 관찰하면서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이론을 비판하고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이론을 옹호했다.

그는 이단에 가까운 위험한 이론을 펼친다는 이유로 1614년 교황의 경고를 받았다.

그리고 《두 개의 주된 우주체계에 관한 대화》를 출간하던 1632년 10월 로마 교황청에 소환되었다.

갈릴레이는 자연의 법칙이 수학적임을 천명한 최초의 과학자일 것이다. “우주라고 하는 이 광대한 책은 수학이라는 언어로 쓰여 있다. 삼각형과 원이 수학의 문자들이다.”

또 목성의 달을 관찰한 최초의 천문학자가 갈릴레이다.

1610년 그는 목성 주위에 있는 네 개의 별, 이오(Io), 유로파(Europa), 칼리스토(Callisto), 가니메데(Ganymede)가 목성의 달임을 확인했다.

목성의 주위를 도는 달들은 모든 천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지구중심이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사례였다. 참 재미있는 발견이었다.

또 갈릴레이는 태양의 흑점을 발견한 최초의 과학자이기도 했다.

천체는 완전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에 흑점의 존재는 중대한 흠집을 냈다.

또 갈릴레이는 달의 산과 분화구를 관찰한 최초의 과학자이기도 했다.

천상의 물체는 완벽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반대하여 달은 지구처럼 거칠고 울퉁불퉁하다는 관찰 결과를 제시했다. 대단한 발견이었다.

갈릴레이의 새로운 발견과 주장은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것들이었다.

갈릴레이는 위험인물이었다. 교회는 그의 새로운 사상을 불순한 것으로 규정했다.

 

 

그러면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천체에 대하여》에서 전개한 우주관을 먼저 확인하자.

 

첫째, 하늘은 신성하고 땅은 천(淺)하다. 하늘은 영원하고 땅은 변화한다.

하늘에 있는 물체들은 생성·소멸하지 않는다. 상하지 않고, 바뀌지 않으며, 모든 변화에서 벗어나 영원히 같은 모습을 유지한다.

둘째, 완전한 운동은 원운동이다. 따라서 하늘의 물체들은 원운동을 한다. 직선운동은 불완전한 운동이다. 따라서 땅 위의 모든 물체는 직선운동을 한다. 가벼운 것, 즉 불과 공기는 상승하고 무거운 것, 즉 흙과 물은 하강한다.

셋째, 무거운 물체는 우주의 중심을 향해 움직이려는 경향이 있다. 우주에는 하나의 중심이 있어야 한다. 우주의 중심에 있다면 물체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거기에 머문다. 우주의 중심은 지구다.

 

갈릴레이는 학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을 달달 외우면서 자랐다.

갈릴레이는 이런 지적 풍토를 용납할 수 없었다.

갈릴레이는 결국 피사 대학교를 중퇴했다.

발군의 과학 논문을 두 편 쓰고 이후 28세의 젊은 나이에 피사 대학교의 교수가 되는 행운을 누리지만 여전히 대학 강단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고리타분한 교설을 가르쳐야 했다.

갈릴레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의심 없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실험하고 확인하고 생각해보았다.

 

 

갈릴레이는 달을 보았다. 사람들은 달의 표면이 거울처럼 윤이 나고 매끄러운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들여다보니 달의 표면은 지구보다 더 심한 곰보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관에 따르면 달은 천상계에 속하며, 따라서 달은 완벽한 것이었다.

하지만 망원경은 천상에 떠 있는 달도 지구나 별다를 게 없는 돌덩어리임을 보여주었다.

이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자연관을 폐기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에 내포된 오류들을 분쇄하는 일도 어려웠지만 우주의 중심은 태양이고 지구는 자전과 공전을 함께한다는 진리를 설득하는 일은 더 힘들었다.

 

 

이제 갈릴레이가 주장한 운동의 상대성원리를 들어보자.

상대성의 원조는 아인슈타인이 아니라 갈릴레이였다.

 

어떤 배가 짐을 싣고 베네치아를 떠나 시리아로 갔다고 하세. 배는 짐을 싣고 항해했지만 이 짐들은 배에 대해서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네.

배와 짐 사이의 위치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어. 왜 그럴까? 배와 짐이 모두 같이 움직였기 때문이지.

다음으로 이런 것을 검토해보자고. 천구는 지구보다 엄청나게 더 크지. 지구 정도의 행성은 천구 속에 몇 백만 개라도 들어갈 수 있어.

그런데 불과 하루 밤낮 동안에 천구 속의 별들을 한 바퀴 돌리려면 천구가 얼마나 빨리 움직여야 할지 생각해봐.

자연은 일부러 어렵게 많은 것들을 움직이지 않을 거야.

지구라는 조그만 물체를 살살 돌리기만 하면 되는데, 이 쉬운 길을 마다하고 구태여 하늘에 있는 저 엄청나게 크고 많은 별들을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속력으로 돌릴 필요가 있겠나?

 

멋있는 상대성원리다. 운동이란 관계다.

두 물체의 상대적 관계 말이다.

너와 내가 같은 방향으로 동일한 운동을 하는 경우 너와 나는 정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내가 정지하고 있는데 네가 운동할 때만 너는 운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차가 출발할 때 우리는 종종 착각하지 않는가.

옆 기차가 움직이는 것인지 내 기차가 움직이는 것인지. 어느 쪽이 움직이든 비슷하게 느껴진다.

 

 

 

 

‘두 우주관의 혈투’가 벌어지는 장소는 이탈리아하고도 물의 도시 베네치아였다.

갈릴레이는 피사 대학교의 교조적 분위기가 싫어 자유로운 베네치아의 파도바 대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베네치아는 로마 교황청을 무서워하지 않는 자유의 도시였다.

또 베네치아는 당시 유럽에서 렌즈 세공술로 명성을 떨치던 도시였다.

갈릴레이가 베네치아에서 좋은 망원경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과학의 행운이었다.

갈릴레이가 베네치아에서 사그레도라는 기계 박사를 만난 것도 축복이었다.

베네치아는 100여 개가 넘는 섬을 운하로 연결한 물의 도시.

이곳에서는 길을 걷는 대신 곤돌라라는 배를 타고 다녔다.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새로운 사상을 암암리에 전파했다.

그가 일반적인 방식으로 그의 사상을 출간했을 당시 그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고, 이 불온한 책자가 교황과 사제들의 두 주먹을 부르르 떨게 했을 무렵에는 이미 무덤에 들어가 있었다.

종교재판소는 무덤에 들어간 사람의 주검까지 부관참시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갈릴레이는 또 달랐다. 갈릴레이는 당당하지 못했다.

비겁했다. 나이 70의 노신사, 아니 인류가 낳은 역사상 최고의 과학자는 무릎을 꿇었다.

대주교 앞에서. 그리고 그는 《성경》에 손을 얹고, 자신의 양심과 사상에 반하는 맹세문을 읽었다.

 

1633년 6월 22일 로마 미네르바 수도원에서 벌어진 희비극이다.

평생 과학의 발견을 위해 땀을 흘린 위대한 과학자가 별 볼일도 없는 무지한 성직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것 자체가 희극이다.

《성경》에 손을 얹고 반성을 하면 무죄로 해주겠다며 인간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희롱한 웃기는 짓이었다.

하지만 맹세문의 낭송 소리가 사라지자마자 교회는 이 약속을 없던 일로 치부했다.

교회는 갈릴레이에게 종신 가택연금형을 선고했다.

설상가상으로 갈릴레이의 유일한 조력자였던 딸 비르지니아가 이듬해 1634년 4월 사망했다.

 

 

1989년 미국 애틀랜타에서 목성을 탐사하기 위한 우주왕복선이 발사되었다.

이 우주왕복선은 목성을 최초로 관찰한 갈릴레이의 이름을 따서 갈릴레이호라 불렸다.

갈릴레이호는 6년 동안 비행하여 목성의 궤도에 진입한 다음 이후 8년에 걸쳐 목성과 목성의 위성들을 사진으로 찍어 보낼 계획이었다.

갈릴레이호가 한창 목성을 향해 날아가고 있던 1992년 10월 로마 가톨릭교회는 중대 발표를 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과학자 갈릴레이를 단죄한 것은 잘못된 일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한 과학자가 이단자의 혐의를 벗기까지 360년의 세월이 소요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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