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철학자

[그리스철학] 소피스트

cbc 2023. 6. 1. 04:06

 

아테네의 전성기를 이끈 페리클레스는 자신이 귀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를 신봉하였습니다.

그의 통치하에 아테네 민주주의는 최고로 발전하게 됩니다.

시민은 누구나 도시국가 안에서 공동의 문제에 관한 발언권과 결정권을 공유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권력을 얻을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능력과 행동을 보여 그들이 나를 인정하도록 설득하는 것입니다.

그 같은 설득력을 갖추려면 우선 한 가지 능력이 필요합니다. 바로 웅변술입니다.

공동 결정에 참여해 내 의사를 관철시킬 훌륭한 말솜씨를 교육할 필요가 생긴 것입니다.

바로 소피스트(지혜를 가르치는 사람)라 불리는 교사들입니다.

 

그들은 유럽 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계몽주의자였습니다.

신 중심의 전통적 세계관, 관습에 입각한 사고방식과 사회적 제약에 대해 맨 처음 도전하고, 인간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 신지식인들이었지요.

그런 이유로 그리스의 젊은 세대들은 소피스트에게 열광했습니다.

그리스 젊은이들은 웅변술을 배워 정치가로서 성공하고자 하였고, 그들이 가르친 새로운 세계에 몰두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지만,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주의자들의 눈에는 소피스트의 가르침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지적 모험에 불과해 보였겠지요.

새롭다는 것은 전통적으로 믿어 왔던 가치를 흔드는 일이니까요.

 

그러나 아테네 민주주의의 자유 이념은 스파르타와의 전쟁이 깊어짐에 따라 차츰 타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급기야 ‘고발업자’라는 신종 직업까지 생겼지요.

소송과 정치적 대립은 날로 일상화되어 갔고,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해 돈을 버는 소피스트들도 다수 등장합니다.

유용한 지식을 가르치는 전문 교사에서 화술을 파는 상인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소피스트들은 학파도 아니고 같은 생각을 지닌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소피스트는 어떤 한 분야에 깊은 지식이나 지혜를 지닌 사람을 지칭하는 당시의 표현이었습니다.

지식을 전수하고 그 대가를 받은 최초의 전문 지식인 그룹이었지요.

그들 각자는 자신이 가르치는 분야도 다르고, 관심도 다르고, 사회와 인간에 대한 생각도 달랐습니다.

 

그러면 최초의 소피스트로 간주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는 그리스인들이 ‘바보들이 사는 도시’라고 불렀던 압데라 출신의 프로타고라스입니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기초를 세우다

프로타고라스는 소피스트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프로타고라스는 서른 살쯤부터 약 40여 년간 소피스트로 활동합니다.

그는 그리스의 여러 도시를 방문했지만, 활동의 무대는 주로 아테네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페리클레스와 친분을 쌓게 되고, 페리클레스가 추구했던 민주주의 이념을 이론적으로 정립했습니다.

페리클레스는 기원전 444년에 남부 이탈리아 투리이에 새로운 식민지를 건설하였는데, 그는 프로타고라스에게 부탁해 투리이 민주주의 헌법을 제정하게 하였습니다.

그에 의하면,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이 정치적으로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점에서 다른 정치체제보다 뛰어난 제도입니다. 민주주의는 시민에 의거하기 때문에, 시민들이 사전에 알지 못하거나 허가하지 않은 일을 정부가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었지요.

그는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는, 정치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정당화하고자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정치적 능력이 교육을 통해 개발되고 발전될 때 비로소 민주주의적 원칙들을 수행할 평균적인 시민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세계의 중심에는 인간이 있다

 

프로타고라스의 핵심 사상은 한마디로 ‘인간 중심주의’와 ‘상대주의’입니다.

그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있는 것에 대해서 그것이 어떻게 있는 것인가에 대한 척도이고, 없는 것은 그것이 어떻게 없는 것인가에 대한 척도이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기준은 인간입니다. 우리 인간의 의식 안에 있으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또한, 인간은 같은 것에 대해 똑같이 느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을 우리는 불가지론 不可知論이라고 합니다.

신들의 존재를 알 수 없고, 인간은 그것을 파악할 수도 없다는 것이지요.

다만 불가지론은 분명 무신론과는 다릅니다. 무신론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론이기 때문입니다.

 

페리클레스가 당시 유행하던 흑사병으로 죽자, 정적들은 그와 친분이 있던 사람들을 제거하기 시작합니다. 당연히 가장 친했던 프로타고라스도 그중 한명이었습니다.

아테네 시민들은 이전에 아낙사고라스에게 그랬듯 프로타고라스를 불경죄로 고발합니다.

당시에 불경죄는 종교적이기보다는 정치적으로 더 많이 이용되었던 죄목입니다.

나중에 소크라테스도 불경죄에 걸려 사형을 당하게 되지요.

재판 결과 프로타고라스는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그는 기원전 421년에 사형을 피해 아테네를 떠났는데, 항해 중에 익사했다고 전해집니다.

 

웅변의 달인, 고르기아스

 

고르기아스는 기원전 480년에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의 레온티노이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레온티노이 시민들은 시라쿠사와 싸울 힘이 부족했기에 동맹국인 아테네에 군사적 도움을 요청하게 됩니다.

이때 사절단 단장으로 선택된 사람이 고르기아스였습니다.

고르기아스는 온통 붉은색의 옷을 입고 아테네의 아고라 광장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윽고 동맹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웅변이 시작되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그토록 매혹적인 연설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눈을 떠보니 스타가 되었다고 했던 어느 유명한 영화배우처럼 고르기아스는 하루아침에 아테네의 스타가 되었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의 연설을 들으려 많은 청중이 객석을 메웠습니다.

또한 그에게 웅변술을 배우려고 젊은 정치 지망생들이 줄을 섰습니다. 

 

웅변술은 정치가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도구입니다.

연설은 말로 이루어지며 귀로 듣는 것이지만, 넓은 의미로는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연설을 하는 정치가는 대중의 귀를 사로잡지만, 동시에 대중은 그에게 시선을 집중하게 됩니다.

즉 그의 연설이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웅변술 또한 아름답게 연설을 행하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고, 고르기아스는 그처럼 아름답게 연설하는 방법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는 언어 사용이 아름답게 느껴지도록 다양한 장치를 고안하고 개발했습니다.

새로운 웅변술은 이렇게 탄생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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