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뇌과학

[뇌의 기억] 작업기억

cbc 2023. 6. 2. 13:15

 

새로운 기억을 형성하기 위해 반드시 주의를 집중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초여름 저녁 해변에서 아름다운 석양이 내 마음을 온전히 사로잡았다고 해서 내가 그 석양을 5년 후에 반드시 기억하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5분 후에 깡그리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주의집중이라는 신경자극이 가해지기에 앞서 먼저 정보 혹은 경험을 장기기억으로 만드는 과정은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뇌전증 치료를 위해 양쪽 해마를 절제한 헨리 몰래슨의 사례로 돌아가보자.

해마가 없어진 헨리는 어떤 장기기억도 새로 만들 수 없었다.

모르는 사람은 영원히 모르는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새로 만들어진 단어, 새로 나온 노래, 신작 영화의 줄거리, 어제 있었던 일, 무엇 하나 기억으로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모든 것에 대한 기억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가령, 그는 의사에게 방금 들은 전화번호나 방금 읽은 짧은 목록을 똑같이 따라 말할 수는 있었다.

물론 1분 후에는 전화번호도, 심지어 의사와 대화를 나눴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했지만 10개의 숫자를 적어도 몇 초 동안은 뇌 안에 머무르게 할 수 있었다.

 

그는 무엇이든 잠깐 동안 기억할 수 있었고, 계속 되뇐 것은 좀 더 오래 기억할 수 있었다.

그는 앞뒤가 호응하는 문장 하나를 끝까지 말하고, 사람들이 하는 말을 이해하고, 주의가 분산되거나 방해받지 않는 조건하에서 지시에 따라 행동할 수 있을 만큼의 시간 동안 기억을 유지했다.

그는 해마도 없이 어떻게 기억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단 몇 초 동안이지만 새로운 정보를 기억할 수 있었던 걸까?

해마는 사라졌지만, 헨리에게는 전전두피질prefrontal cortex이 남아 있었다.

이곳이 바로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하는 부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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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초면 휘발되어버리는기억들

 

지금 이 순간, 의식에 머물러 있는 것은 작업기억working memory이라 불린다.

바로 지금 듣고, 보고, 냄새 맡고, 맛본 것, 지금의 감정, 지금의 언어가 전전두엽의 제한된 공간에 아주 잠깐 머문다.

작업기억은 늘 가동 중이다.

지금 막 경험한 것 또는 주의를 집중한 대상을 딱 필요한 만큼만 보관한다.

가령 작업기억은 지금 읽고 있는 문장의 첫머리를, 문장을 다 읽을 때까지 남겨둠으로써 전체 문장을 이해하는 데 지장이 없게 한다.

 순간을 다음 순간에 이어붙임으로써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을 끊김 없이 이해하게 한다.

또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고, 영화의 줄거리를 이해하고, 12 곱하기 14를 암산할 수 있는 것도 작업기억 덕분이다.

눈으로 본 전화번호나 비밀번호가 전화기나 컴퓨터에 입력할 때까지 사라지지 않고 의식 안에 남아 있는 것도 작업기억 덕분이다.

 

심리학자들은 눈으로 본 것을 처리하는 작업기억을 시공간메모장visuospatial scratchpad이라고 부른다. 포

스트잇에 사라지는 잉크로 급하게 적은 글씨를 상상해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정보는 작업기억 안에 오래 머물 수 없다.

시각정보는 시공간메모장에, 청각정보는 음운루프에 겨우 15~30초 정도 보관된다. 그걸로 끝이다.

보관했던 정보는 새로 들어오는 정보에 자리를 내준다.

매 순간 새로운 일이 벌어지는 것이 인생이다.

우리는 내면과 외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끊임없이 듣고, 보고, 생각하고, 경험한다.

다음 데이터가 작업기억에 들어오면, 먼저 들어왔던 것은 무엇이든 밀려난다.

 

한 가지 정보를 오래 보관하고 싶으면 입으로 계속 반복하거나 머릿속으로 되뇌면 된다.

다시 와이파이 비밀번호로 돌아가 보자. 웹페이지에서 새로 고침을 클릭하듯, 비밀번호를 되뇌면 비밀번호는 다시 지금 이 순간의 정보가 되고 보관시한을 표시하는 타이머는 리셋되어 15~30초의 시간을 벌게 된다.

이 과정을 일정 시간 반복하면 비밀번호는 해마를 거쳐 장기기억으로 견고하게 저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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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기억의 보관용량

 

작업기억은 지속시간도 아주 짧지만 보관용량도 크지 않다.

작업기억이 한 번에 보관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은 얼마나 될까?

작업기억은 15초에서 30초 동안 다섯 개에서 아홉 개까지의 정보를 보관할 수 있다.

다섯 개에서 아홉 개라는 마법의 숫자는 늘어날 수 있다.

기억하려는 정보를, 맥락을 갖춘 덩어리나 의미 단위로 나누면 된다.

10자리의 수를 지역코드 세 자리, 앞 세 자리, 뒤 네 자리, 이렇게 세 부분으로 묶으면 작업기억의 용량을 초과하지 않는다.

또한 2007년 12월 6일이라는 의미 있는 세 개의 단위로 나누었기 때문에 기억하기가 수월하다.

 

하지만 같은 공간에 아무 의미 없이 배열된 18글자를 욱여넣는 것은 무리다.

끝까지 읽었을 때쯤에는 벌써 맨 앞의 글자 몇 개는 밀려난 후일 것이다.

이렇게 기억할 대상을 묶는다면 작업기억에 더 많은 정보를 넣을 수 있다.

반대로 발음에 긴 시간이 소요되는 단어들은 다섯 개에서 아홉 개도 다 들여놓지 못하고, 따라서 기억도 하지 못한다. 

가령 작업기억을 이용해 여러 개의 단어를 외운다고 해보자. 단어의 음절이 많을수록 기억하기 어렵다. 

 

달, 공, 펜, 컵, 문, 돌

쉽지 않은가? 음운루프로 전환된 단어들의 잔영이 들렸을 것이다.

이제 다음 단어들도 딱 한 번만 보고 기억할 수 있는지 시험해보자.

인적성검사, 정형외과학, 건축설계사, 초자연현상, 운명주의자, 전문의약품

차이점이 느껴지는가? ‘운명주의자’쯤에서 그 앞의 단어들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문장은 나누어 읽는다고 해도 너무 길고 복잡해서 작업기억으로 감당하기가 힘들다.

문장 끝부분을 읽을 때쯤이면 이미 첫 부분은 잊은 뒤다.

그래서 앞으로 돌아가 다시 읽어봐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이번에는 더 짧고 단순한 문장을 읽어보자.

아마 한번에 읽고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문장 끝에 도달했을 때도 여전히 첫머리의 단어들이 기억에 남아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끝까지 읽고 이해했다고 해도 몇 초만 지나면 이 문장은 의식에서 스르르 빠져나간다.

외우면서 읽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문장들은 읽자마자 거의 곧바로 작업기억에서 밀려난다.

여기서 잠깐. 작업기억에 보관된 모든 정보가 수 초 만에 날아간다면, 어떻게 우리는 책의 내용을 조금이라도 기억하는 걸까?

 

도대체 작업기억은 무엇을 위한 걸까?

작업기억은 대다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기억의 최초 관문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세세한 정보 가운데 우리의 주의를 사로잡고,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거나 감정을 자극하는 것들은 시한부의 작업기억 중에서도 따로 선택되어 해마로 전송된다.

만약 이 중 일부가 보관할 가치를 지니게 되면, 지금 이 순간 내가 인지하고 중요하다고 여긴 정보가 작업기억의 임시 공간에서 해마로 옮겨질 것이다.

그러면 해마에서는 신경세포들이 흩어져 있는 찰나의 감각정보들을 연결하여, 오늘 우리 집 부엌에서 있었던 일이라는 하나의 기억을 엮어낼 수 있게 된다.

이제 이 순간은 30초 후면 사라지는 기억이 아니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앞으로 수십 년간 기억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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