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머릿속 백과사전 >>
뇌가 어떤 정보를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주의를 기울이면 그 정보는 한시적인 작업기억에서 벗어나 해마로 전달되고 강화 과정을 거쳐 장기기억으로 저장된다.
이렇게 우리가 의식적으로 붙잡아두는 장기기억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이전에 일어난 일에 대한 기억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른바 의미기억semantic memory은 학습한 지식, 삶과 세상에 관한 사실들을 저장해둔, 우리 뇌의 백과사전이다.
이런 정보는 학습 당시의 세부기억을 떠올리지 않고도 기억할 수 있다.
의미기억은 언제 어디서 그 기억이 생겼는지 등과 같은 개인의 경험과는 분리된 지식이다.
살면서 겪은 특정한 경험과도 묶여 있지 않다.
이에 반해 이전에 일어난 일, 특정 장소, 시간과 묶여 있는 정보는 일화기억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런 일화기억episodic memory들을 간직하고 떠올린다.
예를 들어, 나는 빛의 속도가 대략 초속 30만 킬로미터라는 사실을 안다.
나는 이 정보를 의미기억에서 꺼내 왔다.
이 정보를 학습할 당시의 특정한 상황에 대해 떠오른다면(나는 떠오르지 않는다) 일화기억이 된다.
아마 대부분은 이 사실을 학습할 당시의 상황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아주 어린 시절 배웠기 때문에 긴 시간을 거치면서 일화기억이 희미해졌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 배웠는지는 잊어버리고 단지 배운 내용만 기억한다.
개인정보에 해당하는 데이터도 모두 의미기억이다. 나는 11월 22일에 태어났다. 태어날 때의 기억은 없지만,
11월 22일이 내 생일이라는 것은 안다.
서류에 기입하는 인적 사항과 관련된 모든 정보, 즉 이름, 주소, 전화번호, 생년월일, 결혼 여부 등은 모두 의미기억으로 저장된 정보다.
머릿속의 모든 데이터가 의미기억이기 때문에 많은 지식을 갖고 싶다면 의미기억의 생성은 물론 인출도 잘해야 한다.
그렇다면 의미기억은 어떻게 생성되고 인출될까?
오래 유지되는 의미기억은 대개 공부하고 연습해야 만들어지고, 여기에 기억을 유지하겠다는 뚜렷한 의도와 목표도 있어야 한다.
암기는 반복과 노력을 요한다. 하지만 반복과 노력에도 특별히 효과적인 방법이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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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미기억을 강화하는 기억술 >>
살다 보면 때때로 외워야 하는 정보를 저절로 반복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신생아나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는 바로 이런 식으로 말을 배운다.
그런데 반복적이고 습관적인 경험이 우리 뇌에 새로운 의미기억을 서서히 각인시키는 긴 과정을 기다릴 여유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다들 시험이나 발표를 준비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같은 시간을 공부한다면 조금씩 나눠서 외우는 편이 벼락치기보다 유리하다.
기억의 간격효과spacing effect 때문이다.
기억할 정보를 일정 시간에 걸쳐 간격을 두고 외우면 그 내용이 해마에서 완전히 강화될 수 있는 시간이 확보된다.
이렇게 나눠서 외우면 자신이 잘 기억하고 있는지 검증해보기도 쉽기 때문에 암기한 내용이 매우 강력한 회로로 자리 잡는다(이제 곧 설명할 내용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시험 직전의 밤샘 벼락치기는 가급적 피하는 게 좋다.
해마에 잔뜩 욱여넣은 정보를 아침에 토해내는 방식은 당장 좋은 점수를 보장해줄지 모르지만 이렇게 공부한 내용을 다음 주 혹은 다음 학년에도 기억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공부할 내용을 시간 간격을 두고 조금씩 외우면 더 많이 기억하고 덜 잊어버리게 된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기억은 정보를 뇌에 강하게 심는 과정과 뇌에서 정보를 꺼내오는 과정을 모두 포함한다.
학습하고 떠올려야 한다. 새로운 정보를 효과적으로 학습하려면 습득하려는 정보에 뇌를 반복적으로 노출시키는 것은 물론, 학습한 정보를 반복해서 꺼내야 한다.
그러려면 스스로 묻고 답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8 곱하기 3이 24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되뇌기만 할 것이 아니라 ‘8 곱하기 3이 뭐지?’라고 스스로에게 반복해서 질문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답을 맞히면 학습한 정보를 인출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신경세포 간에 형성된 경로가 한 번 더 활성화되고 강화되기 때문에 기억이 더욱 견고하게 자리 잡는다.
우리의 뇌는 지루하거나 무의미한 것들은 알려고 하지 않는다.
더 많은 정보를 기억으로 남기고 싶다면 나에게 의미 있는 정보가 되게 해야 한다.
나도 12쌍의 신경세포 이름을 암기할 때 우선 입에 착 붙는 라임부터 외웠다. “On old Olympus’s towering top, a Finn and German viewed some hops(오래된 올림푸스 언덕 꼭대기에서 핀란드인과 독일인은 홉(식물)을 보았다).” 각 단어의 첫 철자가 후각olfactory, 시각opting, 동안/눈돌림oculomotor, 활차trochlear 신경 등 12개 뇌신경을 순서대로 외울 수 있게 단서 역할을 한다. 문장에는 의미가 있어서 문장을 외우는 편이 연상을 불러일으키는 단서 없이 이름만 외우는 것보다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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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궁전
이처럼 의미기억을 강화하는 데는 단순한 기억술을 넘어서는 다양한 기법이 사용되지만 가장 강력한 방법은 우리 뇌가 지닌 가장 뛰어난 두 가지 재능 가운데 적어도 하나를 활용하는 것이다.
시각 형상화와 물체의 위치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뇌는 우리가 요구하는 대로 다양한 시각 형상을 아주 쉽게 만들어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오프라 윈프리가 부활절 토끼 의상을 입고 커다란 당근을 우적우적 씹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오프라 윈프리가 보이는가? 당연히 보일 것이다.
이제 오프라 토끼를 어딘가에 놓아보자. 오프라 윈프리가 부엌 조리대 위에 앉아 있다.
잘 보이는가? 어렵지 않다.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지금 우리가 시각화한 형상은 매우 강하게 기억에 남을 것이다.
하지만 부활절 토끼로 분장한 오프라 윈프리가 부엌 조리대에 앉아 있는 이미지가 얼마나 쓸모 있을까? 이미지 하나만으로는 별로 쓸모가 없다.
하지만 이 시각과 공간 이미지를 기억하려는 대상과 결합하면 신경세포 간에 매우 강력한 연결망이 형성되면서 기억하고 싶은 정보를 불러오는 데 확실한 효과를 발휘하는 신호가 만들어진다.
『1년 만에 기억력 천재가 된 남자Moonwalking with Einstein』를 쓴 기억력 챔피언 조슈아 포어는 하라구치와는 다른 방식으로 정보를 기억한다.
그는 우선 00부터 99까지의 두 자릿수들을 각각 인물-목적어-동사로 이루어진 의미와 짝을 지어 기억했다.
그러면 여섯 자릿수를 두 자리씩 나누고 묶어서 특정한 인물이 어떤 행위를 하는 장면을 만들 수 있다.
가령 10은 ‘아인슈타인이 / 당나귀를 / 탄다’, 57은 ‘애비 웜백이 / 축구 공을 / 찬다’, 99는 ‘제니퍼 애니스톤이 / 베이글을 / 먹는다’라는 의미와 각각 짝을 이룬다. 그리고 105799라는 여섯 자릿수가 주어지면, 10, 57, 99로 나누어, 순서대로 인물, 목적어, 동사를 붙인다. 그러면 ‘아인슈타인이 축구 공을 먹는다’가 된다. 예측을 벗어나고, 더럽고, 괴상하고, 흉측하고, 요란하고, 실현 불가능한 이미지일수록 더 강하게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유사한 다른 기법들도 그렇겠지만) 이 기법을 실제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많은 것을 외워두어야 한다.
평범한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종류 혹은 이런 막대한 양의 정보를 외우고 싶지 않을 것이고 외울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저 오늘 안에 해야 할 10가지 일, 와이파이 비밀번호, 마트에서 사야 하는 물건 대여섯 개 정도나 잊지 않고 기억하기를 바랄 뿐이다.
이제까지 소개한 반복, 시간 간격을 두고 나누어 암기하기, 자가 테스트, 의미 부여, 시각 공간적 형상화 등의 기법을 정기적으로 활용하다 보면 의미기억은 틀림없이 좋아지고, 그러면 더 많은 것을 기억할 수 있다. 더 많이 아는 것은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장점이다.
더 많이 아는 사람들이 똑똑하다.
하지만 세상에는 정보 말고도 기억할 것들이 많다.
물론 많은 정보를 기억하면 대학 입시에서 만점을 받을 수 있고 TV 퀴즈쇼에 나갈 수도 있겠지만, 많이 안다고 잘 사는 것은 아니다.
살면서 쌓인 여러 인생 경험과 지식이 결합할 때 비로소 우리는 현명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정보와 지식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사건들도 함께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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