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기억은 ‘그때 기억나니……’라는 주문으로 시작하는 과거로의 시간여행이다.
어떤 경험은 평생 달라붙어 사라지지 않는 반면, 어떤 경험은 하루가 채 가기도 전에 사라지곤 한다.
왜 우리는 지금껏 겪은 일 중에 어떤 것은 자세하고 또렷하고 쉽게 떠올리는 반면 어떤 것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어떤 경험을 기억하고 어떤 경험을 잊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왜 그냥 다 기억하면 안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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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지 않는 것부터 떠올려보자
기억하지 못하는 사건들은 공통점이 있다.
하나같이 반복되는 일상의 경험이라는 점이다.
기억에 남을 만한 요소가 전혀 없는 이 사건들은 습관적으로 매일매일 일어나는 단조로운 일들이다.
우리는 깨어 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밥 먹고, 씻고, 물건 사고, 출퇴근하는 데 쓰지만 기억에서 이런 경험들이 차지하는 부분은 매우 작다.
일화기억은 늘 똑같은 일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는 평범하고 전형적이고 뻔한 것들을 오래 담아두지 않는다. 이런 경험들은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잊어버린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억할까?
뇌는 지루하고 익숙한 것들은 지독하게 잘 잊어버리지만 의미 있고, 감정을 자극하고, 예측을 벗어나는 경험들은 기가 막히게 기억한다.
기억에 남는 저녁 식사가 있다면 한번 생각해보자.
모두 어떤 식으로든 특별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금방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익숙하고 파급효과가 없는 일은 무시하도록 학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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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광기억, 강렬한 감정이 남긴 흔적
여러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감정을 유발하는 경험을 그렇지 않은 경험에 비해 더 잘 기억한다.
일반적으로 감정이 강력할수록 기억은 더 생생하고 세세한 내용까지 정교해진다.
뇌는 우리의 경험과 연관해 우리가 어디에 있었고, 누구와 있었고, 언제였고, 그때 기분은 어땠는지 등의 세부적인 맥락을 포착해서 한데 묶는다.
반복되는 일상에는 감정적 요소도 의외성도 없다.
감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경험은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경험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기억을 곱씹는 경향이 있다.
감정과 결부된, 의미 있는 이야기들을 되돌아보고, 다시 말함으로써 이 기억들을 더 강하게 만든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극히 감정적인 어떤 일을 경험한다면 소위 섬광기억flashbulb memory이라는 것이 생성될 수도 있다.
특정 사건이 벌어졌을 때 내가 어디에 있었고, 누구와 있었고, 날짜는 며칠이었고, 어떤 옷을 입었고, 나와 사람들이 무슨 말을 했고, 날씨는 어땠고, 기분은 어땠는지 등의 기억이 사건 전날의 기억 혹은 현재를 기준으로 불과 일주일 전의 기억보다도 훨씬 선명하고 상세하다.
섬광기억은 충격적이고 굉장히 의미 있으면서 공포, 분노, 슬픔, 기쁨, 사랑 등의 격한 감정을 불러일으킨 경험들에 대한 일화기억이다.
이렇게 완전히 예상 밖이고, 개인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으며, 감정이 잔뜩 결부된 경험은 절대 잊지 못할 기억이 되어 몇 년 후에도 금방 떠올릴 수 있다.
사회적으로 떠들썩했던 사건들에 관한 기억만 섬광기억으로 남는 것은 아니다.
교통사고나 부모님의 사망처럼 개인적인 사건도 섬광기억을 만들 수 있다.
또 반드시 부정적이거나 비극적인 사건일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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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어떤 이야기로 가꿀 것인가
나에게 가장 의미 있는 일화기억들을 하나로 엮으면 내 인생 이야기가 된다.
이렇게 한데 모인 기억들은 자서전적 기억autobiographical memory이라고 한다.
첫 키스, 결승골을 넣은 날, 대학 졸업식 날, 결혼식 날, 처음 집을 사서 이사한 날, 파격적인 승진, 자녀의 탄생과 같이 인생의 주요 장면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무엇을 기억하는지는 인생을 어떤 이야기로 만들 것인가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과 인생관에 부합하는 기억들을 저장하는 경향이 있다.
내 친구 패트는 내가 아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긍정적이다.
패트의 자서전적 기억은 틀림없이 웃음, 감사, 경외로 가득할 것이다.
반면 내 친척인 애지 할머니는 불평을 입에 달고 사신다.
할머니의 인생 서사, 즉 할머니가 자신의 인생에서 의미 있는 기억으로 남겨놓은 이야기들을 모으니 한 편의 비극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스스로 총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뭔가 지적인 성과를 냈을 때의 일은 세세히 기억하는 반면 바보 같은 실수를 했을 때의 일은 잊어버렸을 확률이 높다.
계속해서 자신이 얼마나 똑똑한지를 보여주는 일화들에 대해서만 기억을 불러오고 회상하다 보면, 그런 기억들은 더 안정적이고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자신이 똑똑한 사람이라는 믿음도 강해진다.
기억에서 밀려난 일화들 외에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또 무엇이 있을까?
과거의 사건들 가운데 세 살 이전의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여섯 살 이전의 기억도 매우 드물다.
성인이 되어 기억할 수 있는 최초의 일화기억이 형성되는 시기는 평균 3세다.
3세 이전의 기억이 남아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개 동생이 태어나고, 부모가 사망하거나 심하게 병을 앓고, 새집으로 이사하고, 전혀 예측하지 못한 사건이 벌어졌던 기억이거나 다른 사람이 반복적으로 들려준, 나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를 근거로 한 의미기억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가리고 있던 짙은 안개가 걷히는 때는 6세 혹은 7세 정도다.
이제부터의 기억은 나를 중심으로 한 서사에 곁들여진 일화들이다.
7세 무렵의 기억이 내 인생기억을 엮은 텔레비전 드라마의 첫 시즌 첫 회를 보는 느낌이라면, 4세 무렵의 기억은 나와 상관없는 드라마를 아무 시즌이나 골라 중간부터 보는 느낌일 수 있다.
왜 우리는 아주 어릴 때의 일을 조금밖에 기억하지 못할까?
뇌에서 언어의 발달은 일화기억을 강화·저장·인출하는 능력과 상응하여 일어난다.
과거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세부적인 경험을 하나의 일관된 서사로 정리하기 위해서는 언어와 연관된 해부학적 구조와 회로가 갖추어져야 한다.
따라서 성인이 되어 접근할 수 있는 기억은 경험을 말로 옮길 수 있는 언어능력을 갖춘 이후에 일어난 일들에 관한 기억이다.
일화기억을 형성하는 사건들은 대개 15세에서 30세 사이에 모여 있다.
이때가 우리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들이 집중되는 회고절정reminiscence bump의 시기다.
왜 그럴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다양한 방면에서 첫 경험을 가장 많이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기에 인생은 목표와 의미로 채워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기서도 뇌는 의미 있는 것들만 기억한다.
그래서 일화기억을 형성하고 저장하기 위해서는 감정, 의외성, 의미 등이 필요하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런 요소들이 없는 사건도 기억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사람보다 자서전적 기억능력이 월등한 과잉기억증후군(HSAM)을 가진 사람들은 어린 시절이 끝나갈 무렵부터 자신의 인생에 매일매일 일어난 거의 모든 일들을 자세한 부분까지 떠올릴 수 있다.
이런 과잉기억증후군을 가진 사람들(전 세계적으로 확인된 사례는 100명 미만)은 특별한 날이건 평범한 날이건 상관없이 매일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억한다.
과잉기억증후군을 가진 사람에게 그가 살아온 시대에 속하는 날짜를 하나 제시하면, 그는 단 몇 초 안에 그날이 무슨 요일인지, 날씨는 어땠는지, 그날 자신이 누구와 무엇을 했는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세상 사람들이 알 만한 사건으로 무엇이 있었는지, 그 사건들에 대해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말할 수 있다.
과잉기억을 가진 사람들도 남의 얼굴이나 전화번호를 외우고, 배관기사에게 전화하고, 열쇠 둔 곳을 기억하는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억력은 평범한 수준이다.
하지만 일화기억에서만큼은 아직 설명되지 않은 일종의 초능력을 발휘한다.
그녀는 감정적이고 의미심장하거나 예상 밖의 경험들이 평범한 일상보다 특별히 더 잘 떠오르지는 않는다.
모두 똑같이 떠오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정 해에 있었던 일 가운데 여덟 가지에서 10가지 사건들만을 기억한다.
마릴루의 풍부한 일화기억이 우리에게 경이롭듯, 보통 사람들이 겨우 그것밖에 기억 못 한다는 사실이 마릴루에게는 신기하기만 하다.
마릴루는 자신의 놀라운 기억력을 축복으로 여기지만 같은 이유로 인생이 고통스러운 사람들도 있다.
이별, 죽음, 그동안의 실수들, 후회와 모멸의 매 순간을 비롯해 인생 최악의 시기, 가장 고통스러운 날들을 괴로울 정도로 선명하고 상세하게 기억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기억하고 싶다는 궁극의 소망을 이루지만, 결국 그로 인해 고통받는다.
마릴루 역시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전부 기억하지만 그 순간들을 오래 곱씹지는 않는다.
마릴루는 실수로부터 배우고 긍정적인 순간들에 집중하기로 했다.
과잉기억증후군이건 아니건, 어떤 일화기억에 시간을 투자할지는 결국 각자 선택하기 나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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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일상을 기억으로 남기는 법
그렇다면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이 일화기억을 잘 간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올해 있었던 일들 가운데 겨우 8~10가지가 아니라 되도록 많은 추억을 기억으로 남길 수는 없을까?
일상에서 벗어난다.
안 가본 도시로 휴가를 떠나고, 가구 배치를 바꾸고, 반년 일찍 생일을 축하하고, 안 가본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주말에는 꿈에 그리던 자동차를 렌트해보라.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평화로운 나날은 일화기억을 서서히 죽이는 독이다.
모바일 기기를 끄고 세상을 본다.
인지하지 못하면 기억할 수 없다.
시선을 전화기에 고정시킨 채로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아차릴 수는 없다.
오늘날 미국 성인들은 하루 평균 12시간을 각종 화면 앞에서 보낸다.
밤에 여덟 시간을 잔다고 했을 때, 의식이 깨어 있는 동안 화면 밖 세상을 경험하는 시간은 하루 네 시간밖에 안 된다는 얘기다.
인생을 디테일이 풍부하게 살아 있는 입체 세계로 기억하고 싶다면, 2차원 화면에서 나와 3차원의 세계를 살아야 한다.
느낀다.
우리는 감정이 개입된 경험을 무덤덤한 경험보다 더 잘 기억한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더 강력한 기억을 원한다면 내가 무엇을 느끼는지 늘 스스로와 소통해야 한다.
되뇐다.
반복은 기억을 강화한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반추하고, 친구와 통화할 때 그 일에 관해 수다도 떨고, 틈틈이 떠올리면 기억을 간직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일기를 쓴다.
오늘 경험한 일들 가운데 단 한 가지라도 글로 써놓으면 미래에 그 경험을 기억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기록으로 남긴 그 정보를 단서 삼아 오늘 겪은 다른 일들도 떠올릴 수 있다.
심리학자 빌렘 바게나르Willem Wagenaar는 6년 넘게 매일 일기를 쓰면서 2402가지 사건들을 기록했다.
하지만 그는 그냥 기록만 했을 뿐, 적은 것을 다시 읽어보지 않았고 그래서 기억을 인출할 기회를 덤으로 얻지는 못했다.
이후 동료 학자가 그의 기억력을 시험해본 결과 충분히 단서만 주어지면 지난 6년 동안 있었던 일들을 80퍼센트 정도 기억했다. 일기의 효과다!
SNS를 활용한다.
소셜미디어가 수많은 부작용을 야기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잘만 활용하면 긍정적 효과를 발휘하기도 한다.
인스타그램이나 소셜미디어 프로필을 여유롭게 둘러보는 동안 사진들과 거기 붙은 글 한 줄 한 줄이 강력한 단서가 되어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게 한다.
소셜미디어를 이용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일반 사진첩이나 스마트폰에 저장된 사진을 둘러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라이프 로그를 활용한다.
뇌는 동영상을 찍는 카메라가 아니고, 기억은 우리가 인지한 모든 것을 기록하지 않는다.
입는 카메라, 녹음기 등의 다양한 장비를 이용하면 일상적인 활동으로부터 디지털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다.
이렇게 수집된 이미지, 동영상, 소리를 나중에 재생하고 다시 경험함으로써 또 다른 형태의 기억을 인출할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는 그날 있었던 일들에 대한 기억을 강화하고 나아가 다른 기억을 인출하는 단서 역할을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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