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각인된 기억
대중문화에서는 신체 기능에 관한 기억을 근육기억muscle memory이라고 부르곤 한다.
반복하고 집중해서 연습하다 보면 이전에는 서로 무관하던 복잡한 신체 동작들이 하나하나 힘들게 단계를 밟지 않아도 마치 하나의 동작처럼 연결 처리된다.
정확한 동작 패턴이 기억에 저장되면, 어떻게 하는지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물 흐르듯 빠르고 정확하게 동작을 수행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의식적으로 떠올리느라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고도 〈엘리제를 위하여〉를 피아노로 연주하고, 자동차를 운전해 출근하고, 날아오는 야구공을 잡고, 부엌까지 걸어가고, 스키슬로프를 활강할 수 있다.
나이키 광고처럼 ‘그냥 한다Just do it.’ 배우자가 5분 전에 한 말은 생각나지 않아도 근육기억은 여간해서는 손상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수십 년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도 곧바로 다시 써먹을 수 있다.
배워서 알고 있는 방법을 실행하는 것은 뇌에서 기억이 활성화되는 덕분이지만 이런 종류의 기억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기억과는 조금 다르다.
우리는 기억이라고 하면 보통 지식이나 과거의 일화등을 떠올린다.
이런 종류의 기억을 서술기억 또는 명시적 기억이라고 한다.
내가 알고 있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기억이다.
서술기억의 인출을 위해서는 과거에 학습한 정보, 이전에 겪었던 경험을 의식적으로 떠올려야 한다.
이런 종류의 기억을 인출하려는 시도는 평소에 쓰지 않던 근육을 쓰는 것과 같다.
‘내가 이 방에 뭐 하러 들어왔더라? 저 남자 이름이 뭐더라? 전화기를 어디에 뒀더라?’
서술기억을 떠올리는 일은 힘겹고 답답하다.
때때로 의미 없는 일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기억을 찾아 헤매고 있음을 스스로 의식하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지식이나 경험을 떠올리는 일이 견딜 수 없는 고역일 수 있다.
근육기억은 다르다. 근육기억은 운동 기능과 절차에 관한 기억이자 어떤 일을 하는 방법이 기록된 매뉴얼이다.
근육기억은 무의식적으로, 의식의 경계 너머에서 소환되는 기억이다.
자동차를 운전하고, 자전거를 타고,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고, 날아오는 공을 치고, 이를 닦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행위 등은 모두 근육기억을 이용한다.
아주 오래전 우리는 이런 것들을 할 줄 몰랐다.
그러다가 여러 번의 반복과 개선을 통해 방법을 터득했다.
올바른 절차들을 기억에 저장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자전거를 어떻게 타는지 기억하기 위해 잠시 멈추지 않고도 자전거를 탈 수 있다.
그렇다면 근육기억은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어질까?
의미기억과 일화기억은 해마를 통해 강화되는 반면, 근육기억은 뇌의 기저핵이라는 부위에서 연결된다.
하나하나의 물리적 동작들을 연속적으로 수행하면, 이것이 하나의 신경 활성 패턴으로 해석된다.
같은 기술을 계속 연습하면 소뇌라는 다른 부위에서 ‘왼쪽으로 발을 조금 옮겨라’, ‘손목을 굽히지 마라’ 등의 추가적인 피드백을 제공한다.
이렇게 동작이 수정되고 개선되면서 실력이 향상된다.
해마는 새로운 일화기억과 의미기억을 만드는 데는 꼭 필요하지만, 근육기억의 형성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
도무지 치료되지 않는 발작에서 벗어나기 위해 양쪽 해마를 제거한 헨리 몰래슨은 새로운 기억을 의식적으로 저장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근육기억은 만들 수 있었다.
그는 5분 전에 일어난 일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새로운 동작은 배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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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 연습은 뇌를 단련한다
다른 종류의 기억들과 마찬가지로, 지속적인 반복을 통해 근육기억은 더 강해지고, 우리는 더 효율적으로 근육기억을 인출할 수 있게 된다.
연결된 신경세포들이 우리 몸에 행동을 지시하고, 우리는 연습을 통해 더욱 잘하게 된다.
우리는 연습으로 단련된 기능을 더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물론 근육 자체도 단련된다.
장애물달리기를 남들보다 더 잘하는 것은 단순히 허벅지 근육이 더 커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하루 종일 허벅지 단련 운동을 하면 근육은 커지겠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장애물을 완벽하게 넘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연습을 통해 장애물을 잘 넘게 되는 것은 뇌가 커졌기 때문이다.
근육기억이 형성되는 방식은 서술기억이 형성되는 방식과 다르다.
인출 방식도 달라서 그 차이가 매우 극명하다.
일단 학습된 근육기억은 의식적인 노력 없이 불러올 수 있다.
어떤 동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기억에서 불러오긴 하지만 이것이 의식적인 것은 아니다.
자전거를 탈 때, 뇌에서는 많은 일이 일어난다.
페달을 밟고, 몸의 평형을 유지하고, 방향을 바꾸고, 자전거를 멈추기 위해서 뇌는 기억을 끄집어내고 연결된 신경회로를 활성화한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에 나의 의식은 개입하지 않는다.
우리는 의식하지 않은 채 하루 종일 근육기억을 사용한다.
근육기억은 무의식이 관리하는 신경회로에 맡겨버리고, 이미 아는 동작은 저절로 수행되도록 내버려두면, 뇌의 수뇌부, 즉 뇌의 CEO는 생각하고 상상하고 결정하는 고차원적 활동에 여유롭게 전념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걸음을 옮기고 껌을 씹으면서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우리의 뇌는 근육기억을 무한대로 형성할 수 있다.
뇌가 얼마나 많은 동작을 학습할 수 있는지 경이롭기까지 하다.
뇌는 구구단을 암기하고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물론 탱고를 추고, 뜨개질을 하고, 럭비공에 스핀을 넣어 완벽하게 패스하고, 물구나무를 서고, 외발자전거를 타고, 비행기를 날리고, 서핑과 스키를 즐기고, 엄지손가락 두 개로 문자 메시지 쓰는 법을 학습할 수 있다.
비록 우리의 근육기억 활용능력이 국가대표의 경지에는 턱없이 모자라더라도 뭐든 학습은 할 수 있다.
이 모든 활동에 포함된 하위 과정들은 반복을 통해 만들어진 무의식기억이 근육을 움직임으로써 자동 처리된다.
충분히 훈련하면 운동피질 내의 신경연결을 바꿀 수 있고 그러면 처음에는 말도 안 되게 낯설고 불가능해 보이던 동작도 아주 쉽게 할 수 있게 된다.
자전거를 타는 것처럼, 해보면 별것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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