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철학자

[철학자] 칸트의 생애

cbc 2023. 5. 21. 16:53

칸트는 1724년 동프로이센(현재의 독일)에서 11남매 가운데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칸트의 할아버지 한스 칸트는 피혁상이었고, 칸트의 아버지 요한 게오르그 칸트는 둘째 아들이었다.

칸트가 열세 살 때 어머니가, 스물세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칸트의 가정 형편은 여유롭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가난을 딛고 공부에 매진하다

칸트는  ‘김나지움’에서 8년 반 동안 공부했는데, 수학이나 과학보다는 종교와 라틴어를 주로 배웠다.

이때 고전어에 대한 탄탄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슐츠의 권유로 칸트는 열여섯 살 때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넉넉하지 못한 형편 때문에 개인 교사 생활을 하며 학비를 벌어야 했다. 

대학 시절에 칸트는 크누첸 교수(독일의 유명한 계몽주의자인 볼프의 제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어느 날, 크누첸 교수가 뉴턴의 책을 빌려주었다.

칸트는 이 책을 읽고 뉴턴의 사상에 매료되었고, 뉴턴에게 집중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대학을 졸업한 칸트는 학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시골에서 가정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스물두 살 때부터 서른한 살 때까지 목사나 귀족의 가정 등에서 가정 교사를 했다.

그중에는 명문가의 대영주이자 외교관으로서 사교계의 중심인물이었던 카이저링크 백작의 집안도 있었다.

이곳에서 칸트는 상류 사회의 생활과 사교술을 배웠고, 세상물정에 통달했으며, 인간과 세계에 대한 지식을 넓혀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철학을 배우지 말고, 철학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학위 과정을 마친 칸트는 대학에서 강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가르쳐야 할 과목은 수학과 물리학에서 시작하여 논리학, 형이상학, 도덕 철학 같은 철학 분야는 물론이고 자연 지리학, 역학, 광물학 등에 이르기까지 실로 광범위했다.

칸트는 강의를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 집필이나 건강, 휴양을 핑계로 휴강하거나 강의를 게을리하는 일이 없었다.

특히 첫 강의 시간에는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여러분은 나에게서 철학을 배우지 말고, 철학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철학은 단지 흉내 내기 위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15년 만에 철학 교수가 되다

 

마흔두 살의 칸트에게 왕실 도서관의 부사서 자리가 주어졌다.

대단한 직책은 아니었지만, 칸트는 정기적인 수입이 보장된 이 자리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고향에서 조용히 자신의 철학을 완성하고자 했던 철학자에게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그의 나이 마흔여섯 살 때였다. 1770년,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논리학·형이상학의 정교수로 임명되었다.

왕이 내린 교수 임명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당신의 근면함과 탁월함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이 철학에서 이룩한 학문적인 성과 때문에 당신을 교수로 초빙합니다.”

논리학·형이상학 정교수로 취임한 칸트는 이 자리를 평생 지켰다.

철학 교수가 된 칸트는 연구에 전념하면서도 수입을 늘리기 위해 공개강좌를 자주 열었다.

 

유행처럼 번진 칸트 철학

 

‘늦깎이’ 대학교수가 된 칸트는 이후 11년 동안 아무런 저서도 출판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1781년에 『순수이성 비판』이 간행되었다.

이 책으로 칸트는 쉰일곱 살의 나이에 ‘철학의 천재’라는 사실을 온 세상에 증명했다.

칸트는 이제 독일 안에서뿐만 아니라 독일 밖에서도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유럽 전체에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이후 대학 안팎에서 칸트의 학문적 위치는 최고조에 달했다.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의 평의원을 거쳐 학장의 직책도 맡았고, 예순둘, 예순네 살 때의 여름 학기에는 총장에 취임했다. 대외적으로는 예순두 살 때인 1786년에 베를린 학술원 회원이 되었고, 페테르부르크 학술원, 시에나 학술원 회원으로 등록되었다.

학술원 회원은 대단한 자리였다. 왕이나 대통령에게 학술 진흥에 관한 정책을 자문하거나 건의하는 일을 했고, 국내외 학술 행사를 개최하며 우수한 학자나 학문 단체에 상이나 장려금, 보조금을 주도록 정부에 건의할 수도 있었다.

 

 

엄격한 하루 일과로 건강을 지키다

 

생활이 안정되자, 칸트는 결혼을 하려고 했다. 이 무렵, 마음을 사로잡은 두 여자가 있었다.

하지만 청혼하는 데 너무 뜸을 들이다가  떠나고 말았다. 이후에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칸트는 160센티미터도 채 되지 않는 키에 몸은 마른 편이었고, 가슴은 기형적이었으며, 척추는 구부러졌고, 근력도 매우 약했다고 한다.

칸트는 허약한 신체를 보완하기 위해 스스로 세운 규칙적인 생활 습관을 유지했고, 되도록 즐겁게 살려고 노력했다.

그는 나무랄 데 없는 건강을 누리면서 독일인의 평균 수명을 두 배나 뛰어넘는 여든 살까지 장수했다.

칸트의 하루 일과는 매우 엄격하게 짜여 있었다. 그는 여름이건 겨울이건, 매일 아침 정각 5시에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칸트는 아침 식사 대신 차 두 잔을 마시고, 항상 같은 모자를 쓴 채 하루 분량으로 허용된 파이프 담배 한 대를 피웠다.

규칙적인 시간표에 따라 그다음에는 잠옷, 덧신, 수면용 모자를 쓴 채 서재에서 공부를 하고, 약 2시간 동안 집이나 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논문을 썼다.

12시 45분, 람페가 “수프가 준비되어 있습니다!”라고 외치면 칸트는 식탁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후 1시 45분에는 식탁 동료(학자들보다 사회인들이 많았음)를 맞이하여 점심 식사를 했다.

칸트는 하루에 한 끼, 점심만 먹었다. 

오후 3, 4시가 되면 산책을 나가는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변함이 없었다.

칸트는 혼자서 조용히 사색하면서 산책했다.

그는 걷는 동안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을 메모지에 기록했다.

산책할 때에도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일정한 코스를 걸었다.

산책에서 돌아온 칸트는 다시 연구에 몰두하다가 밤 10시에 정확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칸트는 주위 환경도 정확하게 정리 정돈되어 있어야 했다. 

칸트는 무려 여섯 번이나 이사를 하는데, 그 이유는 대개 주변이 시끄러워서였다. 그는 연극이나 그림을 감상하는 일도 거의 없었고, 여행이나 댄스, 사냥이나 운동도 할 줄 몰랐다. 칸트가 즐겼던 취미 생활은 오로지 산책이었다.

 

근검절약하는 철학자

 

기나긴 시간 강사 시절 동안 칸트는 생활고를 벗어나지 못했다. 수입이 너무 적어 끼니를 거르는 일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병이 생길 경우를 대비해, 매월 20타아르의 돈을 저축하고 절대로 꺼내 쓰지 않았다.

덕분에 나이가 들어서는 풍족하게 살 수 있었다. 

칸트는 꽤 큰 재산을 마련했다. 대부분은 강의와 인세, 봉급과 그의 검소한 생활에서 절약하여 모은 것이었다. 

그렇다고 칸트가 구두쇠는 아니었다. 친척이나 해고시킨 하인, 생계가 곤란한 이웃 사람들에게는 연금 등을 지불하며 도움을 주었다.

형제들과 친족들에게 보조금으로 매년 200불 정도를 보내 주기도 했다.

예순 살이 넘어 낡은 집을 하나 샀는데, 집을 꾸미는 일에는 매우 검소했다.

방 안에는 책상과 책장 두 개가 있었고, 벽에는 루소의 초상화 한 장이 걸려 있을 뿐이었다.

 

 

여한이 없다

 

1796년, 칸트는 여름 강의를 중단했다. 

칸트는 더욱더 쇠약해져 갔다. 전혀 먹지 못했고, 말도 하지 못했다.

칸트는 마침내 1804년 2월 12일을 맞이했다. 

칸트는 평소 소박한 장례식을 원했지만 실제 장례식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시내에 있는 모든 교회의 종에서 조종이 울려 퍼졌고, 수천 명의 행렬이 운구 따랐다.

시신은 그가 평생 근무했던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의 캠퍼스 안 묘지에 안치되었다.

지금의 묘에는 『실천이성 비판』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

“내가 오랫동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감탄과 외경을 내 마음속에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내 머리 위에 별이 총총한 하늘과 내 마음속의 도덕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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