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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 모든 사람은 자기만의 세계를 가진다

cbc 2023. 5. 20. 14:55

 

모든 사람은 자기만의 세계를 가진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책 제목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고 정했다.

그는 세계를 의지 측면에서, 그리고 다시 표상 측면에서 다루고자 했다.

그의 사상은 우선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부터 시작을 한다. ‘

표상’이라 함은 머릿속에 그려내는 외적인 대상의 상을 일컫는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 이 말은 살아 있는 인식하는 모든 존재에게 적용되는 진리이다.

그렇지만 인간만이 이 진리를 반성적이고 추상적으로 의식할 수 있으며, 인간이 정말로 이를 의식할 때 철학적으로 사유할 수 있게 된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시작하는 첫 번째 문장은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Die Welt ist meine Vorstellung”이다.

세계는 그것과 관계를 맺는 ‘나’에 의해서만 의미가 있으며 ‘나’에 의해서만 표상된다.

모든 개별자들은 자기만의 세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세계라고 말하는 순간 그 세계는 이미 그 말을 하는 자와 관계를 맺는 것을 전제로 한다.

쇼펜하우어 철학의 불변의 대전제는 그래서 “세계는 표상으로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세계는 다른 존재인 인간이라는 표상하는 자와 관계함으로써만 존재한다”는 것은 그의 철학에서 의심의 여지 없이 받아들여진다.

 

전체 세계는 주관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객관에 지나지 않으며, 직관하는 자의 직관, 한마디로 말하면 표상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말은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에도, 아주 먼 것과 가까운 것에도 적용된다.

 

세계는 주관의 제약을 받는다는 것이다.

나의 세계가 너의 세계와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누구는 힘들다고 말하고 누구는 쉽다고 말한다.

저녁이 되었을 때 누군가는 어둡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밝다고 말한다.

세계는 주관의 제약을 받으면서 다양하게 해석된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것은 불가피하게 주관을 위해서만 존재할 수밖에 없다.

 


 

누구나 소우주이며 동시에 대우주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표상으로서만 세계는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표상은 의지의 객관화의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 “

우리는 표상의 존재이며 동시에 의지의 존재이기 때문에 그 둘 중 어느 하나라도 온전하지 않으면 구원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누구나 두 가지 점에서 전체 세계 자체, 즉 소우주이며, 그 세계의 양면을 완전히 자기 자신 속에서 발견한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자기 자신의 본질로 인식하는 것, 그와 같은 전체 세계, 즉 대우주의 본질도 남김없이 인식한다.

그러므로 그 자신과 마찬가지로 세계도 철저히 의지이고, 철저히 표상이며, 그 밖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세계는 철저히 의지이고, 동시에 철저히 표상이다.

의지와 표상은 세계의 양면이다. 하나는 본질이고 다른 하나는 현상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의지로서의 세계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둘이면서 동시에 하나다.

둘은 별개의 것이면서도 떨어질 수 없는 한 덩어리다.

이러한 논리를 쇼펜하우어가 시도하듯이 인도철학의 방식으로 서술하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우리는 늘 소우주Mikrokosmos이며 동시에 대우주Makrokosmos라고 말이다.

두 가지의 우주는 우리 안에 존재한다. 그것은 오로지 우리 자신만이 인식할 수 있다. 

 

성지순례. 순례의 행령이 끊이지 않는 성지를 향한 길. 순례자가 선택한 길.

그것은 태어난 곳에서부터 시작해 고생하다가 죽음에 이른 곳까지 따라가는 것이다.

고통스러웠던 삶의 현장을 체험하면서 위로와 위안을 받는다. 인식과 깨달음을 얻으려는 목적에서.

과정은 언제나 힘들지만 끝은 행복으로 충만한 구원으로 가득하리라는 믿음.

쉽게 포기 할 수 없는 희망의 메시지임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종교와 형이상학은 피할 수 없는 학문인지도 모른다.

 

자기를 비우고 자기 안에 신성을 채우느냐 아니면 자기 안의 모든 욕망의 불을 끄고 또 다른 신성에 해당하는 무를 자기 안에 채우느냐는 방법의 차이일 뿐 도달하는 경지는 서로 비슷하다.

산스크리트어의 니르바나는 욕망의 모든 불을 꺼 버린 상태를 의미한다.

그것을 우리는 열반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한다. 한마디로 득도의 경지를 일컫는다.

 

하지만 잊지 말 것은 그런 진리는 쉽게 찾아오지 않는 빛과 같은 존재다.

긴 밤을 견뎌야만 겨우 오는 그런 빛이다.

왔다가도 커다란 아쉬움만 남겨 두고 쉽게 사라져 가 버리는 빛.

그래서 자신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성격이 매우 까칠한 미인과 같다.

자신의 모든 것을 주고서도 마음을 얻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없는 그런 여인 말이다.

“빗방울이 무지개를 생성시키는 것은 일순간에 불과한 것과 흡사”한 것처럼 여성성으로 대변되는 진리는 참으로 까다로운 존재다.

 

깊이를 측정하는 납덩어리 측연추. 그것으로 우리는 바다의 밑바닥에 닿게 된다.

그것으로 바다의 깊이를 측정하고 자신이 어디쯤에 서 있는지를 깨닫는다.

그 밑바닥은 설명이 불가능하다. 긴 줄로 연결된 측연추로 전해지는 느낌으로만 예측할 뿐이다.

바다의 밑바닥은 하나지만 장소에 따라 높이는 제각각이다.

모든 인간들은 자신의 인식과 지식으로 삶을 살아가지만 언제 어디서 머물러 서서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이 정해 준 운명을 물어볼 때 우리는 무심결에 바다 속으로 측연추를 던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쇼펜하우어는 이런 질문을 던져야만 하는 우리 인간들을 형이상학적 동물로 보았고, 그래서 인간이 자신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형이상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

과학이 전하는 모든 객관적 설명에서 만족 하지 못하고 더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인간에게는 늘 설명할 수 없는 바다의 밑바닥 같은 것과 직면한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했다. 먼 곳에 이르려는 자, 가능한 한 바다의 깊은 곳에 다다르려는 자는 힘든 항해를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뜻을 굽히지 말라는 뜻은 어떤 고통 앞에서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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