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
쇼펜하우어를 발견한 천재. 그의 이름은 음악가 바그너였다.
바그너는 쇼펜하우어를 천재라 칭했고, 스스로도 쇼펜하우어 추종자라고 서슴없이 밝혔다.
1854년 바그너는 친구인 시인 헤르베크의 추천으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처음 접하게 된다.
바그너의 나이 마흔한 살 때의 일이다.
음악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완숙기에 달한 나이다.
바그너는 그 독서의 영향으로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대한 구상을 한다.
이후 이어지는 그의 생애 마지막 작품들은 모두 쇼펜하우어의 영향하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젊음과 늙음이라는 자극적인 이슈를 내걸고 등장한 신세대 청년독일파는 세대 간의 갈등을 첨예화시켰다.
늙은 세대는 육체의 가치를 높이 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청년에 대한 인식으로 무장한 신세대는 늙은 세대를 정신적 의미에 얽매여서 사는 사람들로 간주했다.
반면, 신세대는 젊음을 이념으로 삼았다.
그 젊음은 육체적 젊음이 우선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정신적 젊음이 중요했다.
젊은 정신! 그것은 사랑을 할 수 있는 열정과 맞물렸다.
신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인간적인 사랑이 그들이 원하는 사랑이었다.
정신적인 사랑이 아니라 육체적인 사랑이었다.
그는 삶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을 원했다. ‘사랑, 육체적 사랑. 그래, 사랑이 구원해 준다.
사랑만이 오로지 구원의 열쇠다.’
이런 이념으로 젊은 시절을 다 보낸 바그너.
그가 맞닥뜨린 새로운 문제는 인생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문제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그때 손에 들려 읽혀진 책이 바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였다.
친구인 음악가 리스트에게 쓴 편지글에 바그너는 다음과 같은 소감을 남겨 놓았다.
세상은 나쁘다. 근본적으로 나쁘다.
오로지 한 명의 친구의 심장만이,
오로지 한 명의 여성의 눈물만이 이 세상을 자신의 저주에서 구원할 수 있다.
이 세상은 알베리히에게 속해 있다! 그 외의 어떤 사람도 아니다! — 이 세상이여 떠나라!
쇼펜하우어의 구원 사상을 무대 위에서 형상적으로 재현했다고나 할까.
바그너의 예술 작품은 그랬다. 그는 철학 사상을 예술 작품으로, 즉 경험의 대상으로 바꾼 천재였다.
이념으로만 머물 수 있는 대목들을 현실적 언어로 바꾼 것이다.
바그너의 업적은 영원한 고전이 되었다.
그의 명성과 함께 그가 발견한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 철학도 불멸이 되었다.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았고 그와 더불어 언제나 함께 거론되는 인물이 되었다.
니체
직접 얼굴을 맞대고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지만, 스승의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수받은 자가 있다면 그를 제자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쇼펜하우어와 니체가 바로 이런 관계에 해당한다.
책을 통해서만 가르침을 받아야 했던 제자는 언제나 깊은 동경으로 스승이 남겨 놓은 책들을 유언을 접하듯 조심스럽고도 신중하게 접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책뿐이니까 말이다.
자신이 이해한 것을 확인해 볼 길도 없다.
쇼펜하우어를 통해 이 시대를 보는 시각을 갖게 된 니체는 그것을 시발점으로 삼아 이 시대에 ‘저항’할 준비를 한다.
스승이 싸우지 않고 체념으로 등을 돌렸던 시대에 니체는 전쟁을 준비한다.
스승이나 제자나 출발점은 같다. 니체도 삶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다
고통에 대한 인식을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데서 염세주의나 허무주의 모두 동일하다.
하지만 그 고통에 대처하는 방법은 전혀 다르다.
염세주의가 체념의 상태로 나아간다면 허무주의는 극복을 통한 회복과 건강을 추구한다.
염세주의가 모든 욕망의 불을 끄기를 바란다면 허무주의는 자신이 불씨가 되어서 자신의 터전까지 불살라 버리는 용기를 바란다.
니체가 알려주는 현실을 살아가는 방법, 그것은 너무도 적극적이다.
주변 환경이 나를 괴롭히면 그것을 불살라 버리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자신이 사는 움막까지도 아끼지 말고 깨부수라고 말한다.
두려워하지 말고,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이를 행하라고 한다.
니체의 자의식이다. “나는 불꽃임에 틀림없다.” 이 불꽃의 씨앗이 되어 준 것이 바로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 철학이다.
스승은 홀로 싸우다 대학교수도 되어 보지 못하고 프랑크푸르트에서 은둔 생활을 하다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그의 가르침을 받은 니체는 정말 미칠 때까지 싸웠다.
정신의 힘이 다 할 때까지 열정적으로 치열하게 싸움에 임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그 책의 첫 장을 읽을 때 어느 정령이 니체의 귀에다 대고 말을 했다고 했다.
“이 책을 집으로 가져가라.”
그 순간부터 이 책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 놓은 책이 된다.
그리고 2주간 소파와 책상을 오가면서 단 한 권의 책만을 읽었다고 한다.
쇼펜하우어가 하는 말이면 모두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고 고백한 바 있을 정도로 니체는 그 책에 쓰인 모든 말을 하나씩 자기의 언어로 만들었다.
독서는 책이라는 매개체로만 머물지 않고 인간 대 인간으로서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이루어졌다. 고
1868년 11월 8일 늦가을 혹은 초겨울 제법 쌀쌀한 날씨에 라이프치히에서 니체는 바그너와 처음 만난다.
그들을 엮어 준 생각은 쇼펜하우어였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이해했던 두 남자가 서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연상해 보면 참으로 흥겹다. 서로가 서로를 너무나도 잘 아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상대방이 그 어떤 말을 해도 다 알아들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말이다. 이런 감정이 그 둘을 친근하게 만들었다.
마치 오랫동안 사귀어 온 친구처럼 느껴졌을 테고, 신뢰 또한 남달랐으리라.
펜하우어를 중심에 두고 쌓여진 우정! 그것이 바로 바그너와 니체의 우정이었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음악의 중요성과 그 깊은 의미에 대한 대화는 젊은 니체를 매혹시키기에 충분했다.
음악과 관련한 모든 천재적 성과를 운운하는 바그너의 음성 속에서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정신을 발견했다.
염세주의 사상은 그들 두 사람의 공통적 관심사였다.
쇼펜하우어의 사상은 음악가와 철학자를 한데 엮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뿌리에서 나왔지만 결과물은 서로 달랐다.
한 사람은 음악극으로 또 한 사람은 철학책으로 자신의 역량을 펼쳤다.
니체에게 쇼펜하우어는 스승이긴 했지만 직접 만나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바그너는 달랐다. 바그너는 니체에게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워 주는 사람이었다.
니체는 아버지와 동갑내기이기도 했던 그를 아버지처럼 따랐다.
니체는 독일의 여러 대학을 순회하면서 바그너에 대한 강연회를 했다.
그의 음악극이 지닌 가치를 강조하며 바이로이트를 마치 성지순례의 대상처럼 부각시켰다. 바그너 띄우기에 제대로 한 몫을 했던 것이다.
바그너는 고급스럽고 체계적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념을 철학적인 말로 옮겨 주는 천재를 제자로 만나 기뻤고, 니체는 뭔가 뚜렷하게 잡히지 않는 뜬구름 같은 낭만주의적 이념에서 방황하다가 샘물을 만난 듯이 갈증을 해소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그러나 이 우정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 음악극을 관람하던 니체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정서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확인한 니체는 극단적인 고독 속에 내몰리고 만다. 그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심경에 놓인다.
방랑 혹은 방황이 그를 인도했다.
고통을 견디지 못하면 미친다. 추운 겨울날 토리노의 광장에서 매를 맞는 말의 목덜미를 잡고 오열하면서 정신 줄을 놓게 되었을 때, 그의 나이 마흔다섯 살이었다. 믿었던 친구의 배신 때문이었을까?
어쨌거나 그는 고독한 시간 속에서 서서히 죽음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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