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철학자

[쇼펜하우어] 부정의 힘

cbc 2023. 5. 20. 03:28

부정의 힘

쇼펜하우어는 “자신을 극복하는 사람에게는 세계가 열린다”라고 말했다.

극복은 언제나 부정을 전제한다. 거부 없는 극복은 한낱 말장난에 불과하다.

극복의 논리를 생각하면 제1차 세계대전이 패전으로 끝난 후 헤세가 내놓은 《데미안》(1919)에서의 한 구절이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 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삭스이다.

 

알을 깨고 나온 새만이 살아남는다. 알을 깨지 못하면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깨야 한다! 깨지 않고서는 그 어떤 삶도 가능하지 않다.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깨야 할 때는 의지가 요구된다.

의지의 형이상학이라 불리는 염세주의는 바로 이때 제 역할을 한다.

“의지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노력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누구는 칭찬을 해야 잘하고, 또 누군가는 야단을 쳐야만 잘한다.

똑같은 사람이라도 칭찬이 먹힐 때가 있고 훈계가 먹힐 때가 있다.

굴러가는 구슬을 한 번 더 쳐서 속도를 높이기는 쉽다.

하지만 문제는 야단을 쳐야 할 상황이다. 칭찬의 힘은 당연하다 하겠지만,

혼을 내고 매를 대야만 하는 사람들은 누굴까? 야단맞고 좋아할 사람은 단연코 없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게도 모두가 싫어하는 체벌이 때에 따라 효과가 있다.

교육적 상황에서 야단치는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은 그것이 역효과를 낳지는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화살이 시위에 가해지는 충격을 견디고 멀리 날아가는 것처럼, 염세주의 사상은 자신보다 더 크고 높은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강한 정신력을 요구한다.

부정을 감당할 만한 힘이 있어야 부정은 긍정적인 결과를 산출할 수 있다.

부정이 주는 고통은 일정 기간의 견딤과 인식을 통해 마침내 열매로 거듭난다. 결론은 언제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고통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혼난다해도 좌절하거나 기가 꺾이지 않는 강한 성격의 소유자일 것이다.

염세주의 철학은 이런 사람에게 어울린다.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결코 굴복하지 않고 뜨거운 열정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자들,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 처지에서도 불안해 하거나 동요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찾는 그런 자들에게 말이다.

삶의 어려움과 그에 동반되는 고통을 인식하고 인정할 수 있는 자에게 염세주의적 사상은 긍정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염세주의 철학은 일종의 비관주의 철학으로 부정의 힘을 길러 준다.

쇼펜하우어 철학은 부정과 거부의 방법을 통해 속박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이것이 바로 삶에 대한 수많은 독설에도 불구하고 독자층을 형성할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닐까?

죽음에 대해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는 자는 삶에 대해서도 진지해질 수 있다.

쇼펜하우어 철학의 핵심을 이루는 삶에의 의지의 부정은 숨 가쁘게 돌아가는 현대인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고, 맹목적인 본능으로 내몰린 도시 생활에 대해 비판의 거리를 갖게 한다.

 

 


 

독서 요령

 

“독서는 사색의 대용품에 지나지 않는다.” 

독서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책을 읽는 이유는 거기서 무엇인가 얻기 위함이다.

손에 주어진 책에서 무엇인가를 얻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는 것, 그것이 독서에 임하는 자세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결코 쉽게 읽혀지거나 쉽게 배울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책이 아니다. 

 

모든 건축물을 관찰해 보면 마치 레고 놀이처럼 처음 놓이는 초석이 있게 마련이다.

그 초석은 모든 추론의 과정에서 제1원인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어떤 것도 원인으로 취하지 않으면서 스스로가 그 다음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초석은 어떤 것에 의해서도 떠받쳐지지 않지만 모든 것을 떠받치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리고 마지막 벽돌 하나 혹은 마지막 레고 조각 하나는 그 다음의 것을 요구하지 않지만 모든 것의 귀결을 담당해야 한다.

바로 이런 건축물의 구조처럼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사상을 세워 나간다고 주장한다.

 

어쨌거나 쇼펜하우어는 어떤 머뭇거림도 없이 유기체와 닮은 자신의 책을 두 번 읽어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한다.

다만 두 번 읽되, 그것도 “강한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야 한다”고 못을 박는다.

인내심이 필요한 책, 그것이 바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다.

그래서 인내심은 이 책을 읽기 위한 필수 조건이 된다.

그리고 결국에는 처음과 끝을 하나의 전체적인 체계로 만드는 시야를 확보해야 한다.

그 경지에 이르러야 이 책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책의 완전한 이해는 오로지 인내심만이 보장해 줄 수 있다.

 

또 쉽게 읽혀지지 않을 책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첫 페이지를 들춰야 하는 독서 행위와 같다.

순탄한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만 그 길을 선택하는 순례자의 길 같다.

독서 자체가 고행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인내심을 요구하는 책이다.

독서를 통해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직접 맞닥뜨리면서 문제의 해결에 집중하는 것이다.

고통만이 인식으로 이끄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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