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여행을 많이 했던 철학자 쇼펜하우어. 그의 사상은 대부분 여행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여행을 통해 세상이 어떤 곳인지, 사람 사는 곳이 어떤 곳인지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했다.
길거리에서 거지들이 손을 내밀며 동냥을 구하는 모습을 보면서 쇼펜하우어는 세상에 대한 깊은 통찰을 얻는다. 그
러다 프랑스 툴롱Tulon에 있는 옛 감옥에서 고야가 그린 <범죄만큼이나 야만적인 감금>을 본 쇼펜하우어는 경악하게 된다.
소년이던 쇼펜하우어는 그 그림 앞에서 쉽게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무엇인가 마법에 걸린 양 그렇게 그림 앞에 한참을 머물렀다.
어둡고 음침한 곳에서 고개를 숙인 채 우울하기만 한 자세로 앉아 있는 노예. 얼굴은 거의 보이지 않고 두 손과 발이 쇠사슬과 쇠족쇄로 묶여 있어, 옴짝달싹할 수 없는 답답함이 느껴진다.
불쌍하고 비참한 인간에 대한 동정심은 쇼펜하우어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
이렇게 해서 지학志學의 나이를 조금 넘긴 열일곱 살에 이미 쇼펜하우어는 “어렸을 때 부처처럼 병, 고통 그리고 죽음과 같은 인생의 비참에 대해” 깊은 생각에 잠긴다.
부처가 궁궐 밖에서 얻은 생로병사에 대한 인식을 사상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처럼, 그 역시 앞으로 해야 할 고민의 대상을 인생에서 얻는다. 스물세 살이 되던 때 그는 다음처럼 말한다.
인생은 불편한 것이다. 나는 이제부터 이것에 대해서 깊이 고민을 할 생각이다.
궁궐 속의 안락한 삶을 영위하며 살던 왕자 싯다르타처럼.
쇼펜하우어는 부유한 가정에서 돈 걱정 없이 어떤 불편함도 모른 채 살아갔다.
그러던 그가 여행을 통해 세상의 불편한 진실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생로병사에 대한 인식을 얻은 후 싯다르타가 출가를 선언하고 6년간 고행의 길을 선택한 것처럼,
쇼펜하우어는 “이제부터 이것에 대해서 깊이 고민을 할 생각”이라고 다짐한다.
염세주의 철학의 출발점에는 암울한 현실에 대한 인식이 자리 잡는다.
누구에게나 삶은 견디기 힘들다. 고통 없는 삶은 없다. 누구나 살아가는 동안 고통에 직면한다.
누구나 고야의 노예처럼 어두운 공간에 갇혀 있으면서 죽음의 위협에 내몰려 사는 존재이다.
죽지 못해 사는 인생들. 이런 인식들에서 염세주의적 의문들이 생겨난다. 죽어야 할 운명에 처한 존재이지만, 적어도 죽기 전까지는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하는 존재.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삶, 그 자체가 고통이라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까?
이 고통스러운 삶과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은 불가능한 것일까?
죽음에 대한 생각이 바뀐다고 현실적 삶에 도움이 될까?
혹은 삶이 즐겁다고 생각한들 죽음에 대한 생각을 견뎌 낼 수 있을까?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의 의지뿐
그의 철학은 복고 정치로 인해 시민 정신이 검열의 대상이 되어 탄압을 받던 시점인 1848년을 전후로 주목을 받는다.
현실에 불만을 품은 시민들이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적 세계관에서 위로를 얻은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쇼펜하우어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는 헤겔이 말하는 것처럼 세상이 이성적 원리로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비이성적 원리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그러한 세상에서 진행되는 삶은 고통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세상은 지옥이다.” 세상은 고해다. 세상은 그 자체가 “눈물의 골짜기”다. 인생은 참된 행복을 맛볼 수 없다.
인생은 본질적으로 다양한 모습을 한 고뇌이며, 전적으로 불행한 상태에 놓여 있다.
이러한 인식에서 쇼펜하우어의 철학적 특징을 나타내는 염세주의 사상이 형성된다.
“모든 인생은 고통이다Alles Leben ist Leiden.” 이것이 쇼펜하우어가 주장하는 염세주의를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문장이다. 삶이 있는 곳에 고통이 있다.
인생이 시작되는 곳에 아픔도 함께 시작된다.
삶에의 의지는 맹목적이면서 무의식적이다.
인간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저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산다. 숨 막히면 숨을 쉬려고 한다.
가능하면 지름길을 찾으려고 안달복달이다.
고통은 이성적 논리에 의한 결과가 아니다. 고통은 정반합의 발전 논리에 의해 제거되지 않는다.
인생은 고통으로 채워져 있고, 죽음은 “주어진 숙제를 다 한 것”에 불과하다.
인간의 삶은 그 자체로 예나지금이나 변함없이 그대로다.
아픔은 언제나 존재한다. 상처는 낫겠지만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삶은 상처투성이로 살아갈 수밖에 없고 또 새로운 상처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삶이 고통인 한에서 살려는 모든 의지는 고통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의 의지뿐”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최고의 선”은 불행의 원인인 바로 이 의지를 완전히 버리라고 가르친다.
의지가 구원의 열쇠임에도 그 의지를 포기해야만 한다는 논리다.
포기의 대상이 되는 의지는 생에의 의지이고, 우리를 구원하는 의지는 삶을 거부하는 의지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그는 “순수한 의지”라는 개념을 언급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생존을 의욕하지 않는 의지”
이다.
바로 이 순수한 의지가 이 고뇌에 찬 세계로부터 해방시켜 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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