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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헤겔의 생애

cbc 2023. 5. 21. 17:18

 

헤겔은 1770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세무 공무원의 2남 1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라틴어 학교를 졸업한 헤겔은 김나지움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늘 모범생이었던 헤겔은 자신의 재능을 인정해 주는 레플러 선생님을 만났다.

그는 레플러 선생님의 『신약 성경』, 그리스 고전, 셰익스피어 희곡 등의 강의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스 비극에 흥미를 가진 헤겔은 소포클레스의 작품 『안티고네』를 번역했다. 그는 일생 동안 그리스 정신에 관심을 가졌고, 그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도 큰 영향을 끼쳤다.

김나지움을 졸업한 헤겔은 그해 가을에 “온 힘을 다해 신학만 전공할 것이며, 신학과 관계없는 직업에는 나가지 않을 것”을 굳게 서약하고, 신학교인 튀빙겐 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그러나 철학의 매력에 빠져들면서 이 서약을 지키지 못했다.

대학에서 헤겔은 동갑인 횔덜린(독일의 시인), 다섯 살 아래의 조숙한 천재 소년 셸링(독일 관념론 철학자)과 친해졌다. 셸링은 선배인 헤겔을 이끌어 나갈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반면에 헤겔은 별다른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성적도 철학을 제외하고는 평균점 이하였다.

친구들은 말없이 자기 할 일만 하는 헤겔에게 ‘노인(할아버지)’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하지만 헤겔 역시 친구들과 문학 논쟁을 벌이기도 하고, 동아리 활동을 하며 소리 높여 자유를 외치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으로 현실에 눈을 뜨다

 

헤겔의 생애가 걸쳐 있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은 산업혁명, 프랑스 혁명, 미국의 독립, 나폴레옹의 집권과 몰락 등 역사적인 사건들이 이어지고 있던 때였다.

헤겔에게 현실에 대한 눈을 뜨게 해 준 사건이 대학 2학년 때 일어났는데, 바로 프랑스 혁명(1789년)이었다.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유럽의 학생들은 자유와 혁명을 찬양했다. 헤겔 역시 혁명에 대한 정열을 불태웠다.

 

 

가정 교사를 거쳐 철학 교수가 되다

 

헤겔은 신학을 전공했다. 따라서 연구 주제는 종교였고, 「민족 종교와 기독교」라는 논문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튀빙겐 대학교를 졸업한 헤겔은 목사가 되기를 거부하고, 철학자가 되기 위해 칸트나 피히테 등의 선배들을 본 따 가정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 셸링의 추천으로 철학자들의 메카로 통했던 예나 대학교에 시간 강사로 초빙되어 갔다.

1805년에는 문교 장관인 괴테의 추천을 받아 같은 대학의  임시 교수로 임명되었다.

 

나폴레옹에 대한 찬양, 그리고 배신감

 

1806년 헤겔은 예나에서 프랑스 혁명군이 진입하는 것을 보았다.

헤겔은 나폴레옹이 자유와 민족주의를 전파하는 것으로 보고 처음에는 매우 높이 평가했다.

같은 시대에 살았던 베토벤이 나폴레옹을 위해 〈에로이카>를 작곡한 것과 똑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베토벤이 실망했던 것처럼, 그 ‘세계정신’은 헤겔에게도 엄청난 고통을 안겨 주었다.

그의 집은 빼앗겼고, 전쟁의 혼란으로 봉급마저 중단되었다.

전쟁 중에 헤겔은 최고의 역작으로 평가받는 『정신 현상학』의 마지막 부분을 탈고했다.

 

뉘른베르크 고등학교의 교장이 되다

 

서른일곱 살, 헤겔의 생애에서 크나큰 사건이 발생했다.

하숙집 부인과 불륜 관계였는데 그 사이에서 사생아 루트비히가 태어난 것이다.

그의 불륜 관계는 곧 알려졌고, 대학을 떠나야만 했다.

직장을 잃고 아버지의 유산마저 바닥내 버린 헤겔은 경제적 어려움에 빠졌다.

『정신 현상학』의 원고료 문제로 출판사와 심한 말다툼을 벌일 정도로 가난한 상태였다.

얼마 후 니트함머의 소개로 헤겔은 밤베르크에서 발행되는 작은 신문의 편집인이 되었다.

1808년, 서른여덟 살인 헤겔은 뉘른베르크 고등학교의 교장으로 8년 간 근무했다.

그리고 두 번째 저서인 『논리학』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 책의 출판으로 보통의 논리학과는 다른 헤겔의 독자적인 논리학이 창출되었고, 철학자로서의 명성도 떨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816년 8월에 하이델베르크로 떠나기까지 헤겔은 뉘른베르크에서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았다.

철학의 학문적 연구에서도 커다란 진전을 이루었다. 바로 중요한 저작인 『대논리학』을 완성한 것이다.

대학교수가 되고자 하는 헤겔의 꿈은 1816년 가을에 이루어졌다.

헤겔의 저작이 알려지면서 이곳저곳에서 교수로 초빙하겠다는 제안이 들어왔다. 

 

결혼으로 세속적인 목적을 완전히 이루다

 

헤겔은 마흔한 살에 명문 집안 딸인 마리 폰 툭허와 결혼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딸 하나와 아들 둘이 태어났다.

그의 세 번째 책인 『철학 총설』이 출판되었는데, 헤겔 철학의 모든 것을 보여 주는 대저작이라 할 수 있다.

1818년 마흔여덟 살인 헤겔은 작고한 피히테의 후임으로 베를린 대학교의 교수로 취임했다.

그리고 1821년 『법철학 강요』를 내놓았다.

이때야말로 그의 학문적 활동의 마지막 시기이자 가장 화려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칸트 이전의 모든 사상은 칸트로 흘러 들어와 독일관념론이라는 호수에 고여 있다가, 헤겔을 통해 흘러 나가 이후 모든 사상의 원천이 되었다.”

이 말은 헤겔 철학이 서양 사상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단적으로 표현해 준다.

 

 

쇼펜하우어에게 참패를 안겨 주다

 

한편, 쇼펜하우어는 헤겔을 비난하고 나섰다.

“모순투성이의 서생(글만 읽어 세상일에 서투른 선비)이 삼십 년이란 긴 세월 동안 독일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간주되어 왔지만, 후세에는 헤겔에 대한 진실이 폭로되고야 말 것이다.”라고 예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의 예언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헤겔에 관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왔고, 전 세계에 헤겔학회가 결성되었으며, 온갖 종류의 헤겔 학도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의 제자인 마르크스를 통해 공산당 선언, 레닌 혁명 등과 같은 세계적인 사건에까지 관여하고 있다.

헤겔의 사상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헤겔을 향한 쇼펜하우어의 지나친 분노는 개인적인 원한에 근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를 강사로 채용하는 시험의 심사 위원장이었던 헤겔이 그를 떨어뜨리는 데 있었다.

 

1819년, 쇼펜하우어는 야심찬 저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내놓았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자 불안한 미래가 걱정되어 베를린 대학교의 철학 교수에 지원했다.

당시 쇼펜하우어는 교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대학은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1820년 3월 18일, 쇼펜하우어는 학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틀 전 헤겔에게 「충족 이유율의 네 가지 근거에 관하여」 강의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요청을 했으며, “헤겔 교수는 매우 감사하게도, 아주 기꺼이 허락을 해 주셨습니다.”라고 썼다. 그렇다면 헤겔이 직접 쇼펜하우어의 앞길을 가로막은 일은 없었다는 말이 된다.

문제는 쇼펜하우어 자신에게 있었던 것 같다.

자기의 강의를 헤겔의 강의 시간대로 옮겨 개설한 것이다. 그런데 헤겔의 강의실에는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학생들이 몰려들었던 반면, 그의 강의실에는 겨우 서너 명밖에 없었다. 

 

 

학생들이 몰려드는 묘한 강의

 

교수가 된 첫해에 헤겔은 4명의 학생으로 강의를 시작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다음 해에는 수강생이 70명이 넘었고, 헤겔을 숭배하는 귀족까지 생겨나 명성이 점점 더 높아졌다.

헤겔의 강의에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힘이 있었다. 한 학생은 헤겔이 강의하는 모습을 이렇게 썼다.

이처럼 헤겔이 진지하게 강의하고 깊이 있게 생각하는 철학자라는 이미지가 생겨나자, 학생들이 더욱 늘어났다.

심지어 그의 몸짓이나 말하는 태도를 흉내 내는 사람들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프로이센의 국가 철학자로 불리다

 

헤겔은 그 철학의 심오함으로 대학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마침내 헤겔은 ‘프로이센의 국가 철학자’로 공인되다시피 하여 독일 철학의 태두로 군림했다.

그의 제자들도 여러 대학의 교수직에 임명됨으로써 헤겔학파는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1829년에는 베를린 대학교의 총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1831년, 헤겔은 베를린 전 지역에 맹위를 떨치던 급성 콜레라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에 그는 “나의 학생 중에서 나를 이해한 사람은 단 한 명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잠시 사이를 두고 “아니, 이 학생도 나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어.”라고 덧붙였다.

헤겔의 유해는 그가 원했던 대로 베를린의 피히테 묘 옆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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