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독일 작센 주의 작은 마을 뢰켄에서 개신교 목사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밤늦게 귀가하다가 현관 앞 층계에서 넘어져 뇌진탕으로 세상을 떠났다.
스물다섯 살의 젊은 아내와 세 자녀를 남겨 둔 채였다.
8개월 후 두 살 난 남동생 요세프마저 죽자, 어머니는 니체와 딸을 데리고 외가로 갔다.
다섯 살이었던 니체는 외할머니, 어머니, 노처녀 이모 두 명, 여동생 사이에서 자랐다.
그들은 니체를 무척 귀여워했다.
그러나 환경의 영향인지 니체는 여성적이고 섬세하며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로 자랐다.
기독교에 반감을 가진 꼬마 목사
어린 시절의 니체는 기억력이 매우 뛰어났다.
성경 구절과 찬송가를 기가 막히게 암송해 ‘꼬마 목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워 즉흥 연주를 하는가 하면, 여덟 살 때 작곡을 하는 등 음악에 남다른 재주를 보였다.
열네 살 때에는 자서전을 쓸 준비를 했다. 명문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특출한 학생으로 손꼽혔다.
음악과 독일어 작문에서 월등한 재능을 보였고, 수학과 철자법이 다소 부진했을 뿐이다.
아버지가 목사이고, 어머니도 목사 집안의 딸인데도 니체는 “기독교 도덕은 삶에 대한 범죄이며, 인류를 망쳐 버린 것”이라고 비난했다.
기독교에 대한 반감은 이때부터 마음속에 자리 잡았을 가능성이 크다.
쇼펜하우어에 빠져들다
고등학생 시절 니체는 학교의 딱딱한 분위기와 낡은 도덕을 비웃으며 반항아적인 기질을 보이기 시작했다.
니체는 어머니의 소원대로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과에 등록했다.
하지만 성적은 신통치 않았고, 기독교에 대한 회의감에 빠져 있었다.
리츨 교수를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교로 간 니체는 본 대학교에서의 실패를 만회하겠다는 자세로 문헌학 연구에 정열을 쏟는다.
그러던 어느 날, 헌책방에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구입했다.
그는 꼬박 2주일에 걸쳐 탐독한 후 이렇게 말했다.
“쇼펜하우어는 꼭 나를 위해서 이 책을 써 놓은 것 같다.”
이 일은 니체가 철학과 관계를 맺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박사 학위 없이 교수가 되다
니체는 스물세 살 되던 해에 군대에 징집되었다.
복학하여 대학을 졸업한 니체는 리츨 교수의 추천으로 박사 학위도 없이, 스위스 바젤 대학교의 문헌학 교수로 초빙되었다. 리츨 교수는 추천서에 이렇게 썼다.
“나는 벌써 39년이란 세월 동안 젊고 유능한 젊은이들이 내 앞에서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니체처럼 이렇게 젊은 나이에, 이렇게 빨리 성숙한 청년을 일찍이 본 일이 없다. …… 니체는 천재다.
그는 하고자 하는 일을 무엇이든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스물다섯 살 되던 해에 니체는 독일의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라이프치히 대학교 교수회는 “그는 이미 교수이므로, 우리들이 동료를 테스트할 수는 없다.”라는 결의를 발표했다.
니체는 바젤 대학교에서 대학이라는 울타리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자재로 강의 활동을 했다.
1870년 보불 전쟁이 일어나자 니체는 위생병으로 지원해 전쟁터에 나갔다.
그러나 이질과 디프테리아에 걸려 건강이 크게 나빠졌다.
이때 약을 잘못 쓴 탓에 극심한 신경 쇠약과 위장병으로 평생 병마와 싸워야 했다.
스물일곱 살에 병으로 휴가를 낸 그는 병석에서 6주일 만에 『비극의 탄생』•을 써서 출판했다.
기독교를 비방한 이 책은 음악가 바그너와 몇몇 친구들로부터는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학계와 학생들로부터는 반감을 샀고 외면당했다.
바그너를 숭배하다
니체는 음악을 사랑했다. “음악이 없었다면, 나에게 인생은 전혀 무의미했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특히 십 대 시절부터 바그너•의 곡을 직접 피아노로 연주했다.
바젤 대학교 교수로 임용되면서 니체는 서른한 살이나 차이가 나는 바그너와 개인적으로 깊이 교류했다.
바그너의 집 근처에 살던 니체는 매일 그의 집에 놀러 가 살다시피 했다.
이때부터 니체는 열렬한 바그너 숭배자가 되었다.
자신의 첫 책인 『비극의 탄생』을 바그너에게 바치기도 했다.
그러나 4년이 지나면서부터 바그너와의 관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1876년 바그너는 25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온 〈니벨룽겐의 반지〉를 완성했다.
이 작품은 유럽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니벨룽겐의 반지〉 4부작의 초연을 보고 난 니체는 그에 대한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니체는 바그너가 기독교적 예술을 추구하고, 개인적으로는 군주에게 충성을 다하는 권력의 시녀로 전락해 버렸다고 생각한 것이다.
바그너는 니체가 적나라하게 비판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오자 그것을 잡지에 공개해 버렸다.
이 일로 타격을 받은 니체는 바그너를 마음속에서 아예 지워 버렸다.
병상에서 수많은 책을 쓰다
서른다섯 살 때인 1879년, 니체는 교수직을 사임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먼저 견디기 힘든 두통과 눈의 통증, 우울 증세를 들 수 있다. 다
음으로 사람들과 교제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 대학교수의 의미에 대한 회의감이었다.
마지막으로 “바보 같은 학생들을 상대하고 있다가는 이쪽까지 바보가 되고, 재능 없는 다른교수를 상대하고 있다가는 이쪽의 재능까지 더럽혀진다.”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이후 10년간 유럽을 떠돌아다니며 책을 쓰는 데 전념했다. 니체는 불과 10여 일 만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1, 2, 3부를 차례로 완성했다.
하지만 1년 동안 겨우 60부가 팔려 나갔을 뿐이다.
그나마 4부는 출판사를 구하지 못해, 자신의 경비로 책을 내야 했다.
그는 40부를 인쇄하여 일곱 명의 친구들에게 증정했다.
니체는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천재성을 인정받지 못한다고 생각해 외로워했고, 책을 들여다보며 몇 시간씩 울기도 했다.
사상을 왜곡당하다
마흔다섯 살 때(1889년)에 몸이 급속히 쇠약해진 니체는 이탈리아 토리노의 길거리에서 발작을 일으키고 쓰러졌다.
그는 마부로부터 학대받는 말을 끌어안으며 흐느껴 울었다.
혼란스러운 이야기로 횡설수설하는 그를 사람들이 집으로 옮겼다.
이틀 만에 깨어난 그는 정신 착란에 빠졌고, 예나 대학 병원에서 진행성 마비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평생을 불우하게 보낸 니체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그가 쓰러진 후부터였다.
어머니의 헌신적인 간호와 여동생의 보살핌 속에서 12년을 혼수상태에서 헤매던 니체는 1900년 심장 쇠약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에는 그의 희망에 따라 친구 몇 사람이 참석해 고별사를 낭독했다.
니체가 죽은 뒤, 방대한 양의 유고와 편지는 누이동생 부부의 손에 넘어갔다.
그녀는 재빨리 ‘니체 문헌 보관소’를 만든 뒤, 니체의 글을 체계적으로 모아 출판했다.
그러나 누이동생은 그 내용을 의도적으로 생략하거나 과장함으로써 니체의 사상을 왜곡시켰다.
니체의 유고 가운데 반反유대주의로 연결될 수 있는 내용을 짜깁기하여, 나치 독일에 매우 만족스러운 사상적 명분을 제공한 것이다.
그 때문에 니체의 책은 오랫동안 반反유대주의자들과 파시스트들에 의해 악용되었다.
니체는 철학자로 명성을 얻었지만, 정작 그로 인해 부귀영화를 누린 것은 누이동생이었다.
정작 니체는 바그너의 신봉자이자 지독한 반유대주의자인 매부를 매우 싫어했다.
니체가 살아 있었다면 자신의 사상을 나치스가 빼앗아 간 일을 절대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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