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당신은 산책하러 나갔다가 폭주하는 열차가 다섯 명의 노동자를 향해 선로를 따라 돌진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모두 죽게 될 것이다. 열차가 노동자들을 압살하고 말 것이다.
열차가 너무나도 빨리 달리는 탓에 그들은 선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당신은 열차의 방향을 다섯 명의 노동자가 있는 선로에서 단 한 명의 노동자가 있는 선로로 바꿀 수 있을 만큼 선로전환기와 가까운 곳에 있다.
이 무고한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옳은 일인가? 숫자로 따지면 분명히 옳은 일이다.
단 한 명만 죽게 함으로써 다섯 명을 구하는 것이다.
이는 분명 행복을 최대화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 일처럼 보인다.
현실에서는 선로전환기를 누르고 그로 인해 누군가가 죽는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 힘들겠지만, 망설이다가 그보다 다섯 배나 많은 사람이 죽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훨씬 더 나쁜 일이 될 것이다.
이것은 영국의 철학자 필리파 풋(1920~2010)이 처음 고안해낸 사고실험의 변형 중 하나이다.
그녀는 선로에 있는 다섯 명의 노동자를 구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으면서도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다른 경우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에 관심이 있었다.
건강한 사람이 병동으로 걸어 들어온다고 상상해보자. 이 병동에는 저마다 장기가 절실하게 필요한 다섯 명의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심장이식을 받지 못하면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
건강한 사람을 죽이고 해부해서 건강하지 못한 다섯 사람에게 장기를 제공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건강한 한 사람을 죽여서 심장, 폐, 간, 신장을 적출하고 그것들을 다섯 사람에게 이식하는 것이 용납될 거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지만 이것 또한 한 명을 희생하여 다섯 명을 구하는 경우이다. 폭주하는 열차의 경우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
사고실험이란 특정한 문제에 대해 우리의 감정, 즉 철학자들이 ‘직관intuitions’이라고 부르는 것을 드러내도록 고안된 가상의 상황을 말한다.
사고실험은 우리가 문제의 핵심에 더 면밀히 집중하게 한다.
이 경우에 제기되는 철학적 문제는 ‘더 많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한 생명을 희생하는 것은 언제 받아들일 수 있는가?’이다. 폭주하는 열차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이 점을 생각해보게 한다.
어떤 사람은 절대 선로전환기를 눌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신의 역할을 하는 것playing God’, 즉 누가 죽어야 하고 누가 살아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로전환기를 눌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와 관련된 또 다른 경우를 상상해보자.
미국의 철학자 주디스 자비스 톰슨(1929~ )이 변형한 탈주하는 열차의 사고실험이다.
이번에는 탈주하는 열차가 일직선의 선로 위를 달리고 있고, 그 선로 위에 있는 다섯 명의 불운한 노동자는 당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 확실하다.
당신은 구름다리 위에 서 있고, 당신 옆에는 덩치가 아주 큰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만약 당신이 구름다리 위에서 선로로 밀어 떨어뜨린다면 열차의 속도를 늦추고 다섯 명의 노동자를 치기 전에 열차를 멈추게 할 만큼 육중하다.
이 사람을 열차 앞으로 밀어 떨어뜨릴 힘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렇게 해야 할까?
많은 사람들은 이 경우가 더 어렵다고 생각하고, ‘아니다’라고 말하는 경향을 더 많이 보인다.
선로 위에 분기점이 있고 가까이에 선로전환기가 있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당신의 행동에 따라 다섯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이 죽는 결과가 나온다고 해도 말이다.
사실 덩치가 큰 사람을 구름다리에서 밀어 떨어뜨리는 것은 살인과 아주 유사해 보인다.
만약 이 두 경우에서 결과가 동일하다면 어떤 논란도 있어서는 안 된다.
첫 번째 경우에서 선로전환기를 누르는 것이 옳은 일이었다면 두 번째 경우에서 덩치가 큰 사람을 열차 앞으로 밀어 떨어뜨리는 것도 분명 옳은 일이어야 한다. 참으로 곤혹스러울 따름이다.
앞서 예로 든 경우들이 너무 억지스럽고 일상생활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맞는 말이다. 실제 경우를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념을 명확하게 밝히기 위해 고안된 사고실험들이다.
하지만 때로 비슷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실제 상황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는 런던의 일부 지역에 비행폭탄을 발사하고 있었다.
한편 이중 스파이가 된 독일 스파이가 있었다.
영국은 독일로 비행폭탄이 의도한 목표 지점보다 훨씬 북쪽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잘못된 정보를 보낼 기회가 생겼다.
다시 말해 사망자를 더 적게 낼 수 있는 정보를 줄 가능성이 있었다.
이 경우에 영국은 신의 역할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다른 종류의 실제 상황에서는 참가자들이 행동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1987년 제브뤼헤 참사에서 카페리가 침몰해 수십 명의 승객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바다에서 나오려고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줄사다리를 타고 안전한 곳까지 올라가서는 공포에 질려 움직일 수 없었던 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적어도 10분간 그 자리에 머물면서 다른 사람들이 바다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막고 있었다.
사람들이 서둘러 바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익사하거나 얼어 죽을 터였다.
결국 바닷속에 있는 사람들이 청년을 줄사다리에서 끌어내리고 어렵사리 안전하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청년은 바다로 떨어져 익사했다.
청년을 사다리에서 끌어내리기로 한 결정은 틀림없이 고통스러웠을 테지만, 탈주하는 열차의 경우처럼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마도 옳은 일이었을 것이다.
주디스 자비스 톰슨이 고안한 또 다른 사고실험에 대해서도 논쟁 중이다.
이것은 피임법을 사용했지만 임신을 하게 된 여성에게 배 속의 태아를 낳을 도덕적 의무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고실험이다.
그녀가 낙태를 한다면 그것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이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기를 낳는 것은 자비심에서 비롯된 행위이지 의무가 아니다.
전통적으로 낙태의 도덕성에 대한 논쟁은 태아의 관점에 초점을 맞춰왔다.
톰슨의 주장은 여성의 관점에 상당히 무게를 두었다는 점에서 중요했다. 다음은 그 예이다.
톰슨이 이 예를 제시하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 중요한 질문은 ‘태아는 사람인가?’였다.
그들은 태아가 사람이라는것을 보여줄 수 있다면 어떤 경우에서나 낙태는 분명히 비도덕적일 것이라고 믿었다.
톰슨의 사고실험은 태아가 사람이라고 해도 그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다는 점을 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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