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철학자

[동양고전사상] 최제우 동학농민운동

cbc 2023. 5. 25. 14:30

 

 

 

최제우, 득도하다

 

최제우는 몰락한 양반 가문의 서자로 태어났다.

그래서 천대받으며 자랐고 특별히 하는 일도 없었다.

스물한 살 때부터 처자를 돌보지 않고 떠돌이 생활을 했다.

봇짐장수, 서당훈장, 약장사, 점쟁이 등 먹고살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 했다.

그러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결국 떠돌이 생활 10년 만에 집으로 돌아와 조그만 철물점을 냈다.

그러나 도를 닦는답시고 이 산 저 산에 들어가 기도를 하며 세월을 축냈다.

그러던 어느 날, 도를 깨치기 전에는 산을 내려가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본격적인 도 닦기에 들어갔다.

그렇게 6개월. 최제우는 마침내 득도를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체험을 설명했지만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오

히려 주변 사람들은 최제우의 득도를 인정하지 않고 이상한 말이나 한다며 비난하기 일쑤였다.

최제우는 다시 1년 가까이 자신이 체험한 내용을 되새기며 탐구를 했다.

마침내 자신이 체득한 도가 올바르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 도를 전파하기 위해 세상으로 나왔다.

그렇게 동학(東學)이 탄생했다.

 

최제우는 포교 활동을 하며 그때그때 필요한 글을 썼다. 마치 기독교의 바오로가 선교 활동을 하며 그때그때 필요한 편지를 쓴 것과 같다.

최제우의 글을 모아 1880년에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崔時亨)이 한 권의 책을 발간했다.

그 책이 《동경대전(東經大全)》이다.

 

 

최제우의 호소

 

역사적 전환기에 백성들 속으로 파고드는 종교의 출현은 오래전부터 반복되어온 일이다.

새로운 종교는 백성의 열망을 담고 있어서 그 세력이 급속히 확대된다.

동학 역시 마찬가지였다. 동학은 민란이 빈발하고 서양의 동양 침략이 노골화하던 전환기에 새로운 종교로 탄생했다.

 

백성은 편안한 날이 없고 서양의 기세는 드세며 중국은 거의 멸망하여 우리나라 역시 멸망할 가능성이 높은데,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계책은 없다.

그런데도 자신의 설교를 비난하기만 하니, 나라와 백성의 앞날이 매우 걱정된다고 최제우는 한탄했다.

 

그래서 최제우는 간곡히 호소했다. “현명한 사람들이 나의 말을 듣고 그중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의 미래가 대단히 개탄스럽다. 세상이 이러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기억나는 대로 간략히 써서 타이르면서 가르치고자 한다. 공손하게 이 글을 받고 나의 말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받들기 바란다.”

현명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최제우의 말을 외면했다.

그러나 백성은 달랐다. 공손하게 최제우의 글을 받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최제우의 말을 받들었다.

 

 

최제우를 체포하기 위해 경주에 갔던 선전관 정운구(鄭雲龜)는 임금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조령에서 경주까지 400여 리가 되고 도읍이 스무 개 가깝습니다.

동학에 대한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경주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심해져서 주막집 여인과 산골짜기 아이들까지 동학의 주문을 외우고 있었습니다.”

동학은 백성들 속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왜 동학인가

 

기독교에서도 하느님을 말하고 동학에서도 상제, 즉 하느님을 말하니 그 둘의 차이를 알기 어려웠다.

특히 서학에 대한 탄압이 극심한 상황에서 동학이 서학과 다르다는 점을 보여주어야 했다.

최제우는 한 선비와 대화하는 형식을 빌려 동학과 서학의 차이를 밝혔다. 선비가 물었다.

지금 하늘의 신령스러운 기운이 선생님께 내렸다고 하는데 어찌하여 그렇게 되었습니까?” 최제우가 대답했다.

“가는 것이 없으면 돌아오는 것도 없다는 이치를 받았기 때문이다.”

선비가 재차 물었다. “서양의 도와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최제우가 대답했다. “내가 받은 도는 인위적으로 하지 않아도 변화가 일어난다. 마음을 지키고 기를 바르게 하고, 본성에 따르고, 가르침을 받으면 변화가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서양인들은 말에 차례가 없고 글에 옳고 그름이 없다.

하느님을 위하는 마음 없이 엎드리기만 하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기도한다.

그 본체는 기가 변화하는 신(神)이 아니고, 그 학은 천주의 가르침이 아니다.

형식은 있으나 하느님의 자취는 없고, 하느님을 생각하는 것 같으나 빌지도 않는다.

도는 텅 비어 아무것도 없고, 학은 천주의 학이 아닌데 어찌 다르지 않다고 하겠는가.”

 

가는 것이 없으면 돌아오는 것도 없다.

하느님께 가는 것이 있어야 하느님으로부터 돌아오는 것이 있다.

따라서 마음을 바르게 하고 본성에 따르며 가르침을 제대로 받으면 변화는 저절로 일어난다.

자신의 수양이 먼저이지 무언가를 바꾸어달라고 하느님에게 빌 필요가 없다.

이것이 최제우가 깨친 이치다. 그런데 서학은 그 반대다. 자기 자신만을 위할 뿐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무언가 해달라고 하느님께 빈다. 따라서 서학은 하느님 중심이 아니다.

형식만 하느님을 따를 뿐, 서학 안에는 하느님의 자취가 없다.

이렇게 내용이 다르니 이름 역시 달라야 한다.

최제우는 동쪽에 있는 조선 땅에서 도를 받았으므로 이름을 동학이라 했다.

최제우가 서학에 맞서 동학을 창설한 것은 민족적 각성의 반영이었다.

 

 

 

5만 년 만에 기회가 왔다

 

최제우는 세상 개벽의 때가 왔다고 했다.

개벽된 세상이 되면 지금의 부귀한 사람은 빈천하게 되고, 지금 빈천한 백성들은 부귀하게 된다.

백성이 주인이 되는 시절이 온다는 말이다.

이렇듯 최제우의 사상에는 백성의 열망을 담은 민중적 각성이 들어 있다.

 

5만 년 만에 한 번 찾아온 이 기회에 용천검을 아니 쓰면 언제 쓸 것인가.

이렇게 세상을 바꾸는 일에 백성들이 함께 일어나자고 했다.

동학이 확산되자 조정에서는 혹세무민(惑世誣民) 죄로 최제우를 체포하여 효수형에 처했다.

러나 최제우는 갔지만 그의 뜻은 사라지지 않았다.

최제우의 처형은 오히려 동학교도들을 단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체포령이 내려지고 포위망이 좁혀오자 최제우는 시를 한 편 지었다.

 

다 함께 그 운세를 밝혀 모든 사람이 지혜롭고,

모두 함께 배움의 맛을 얻으니 모든 사람의 생각이 같구나.

만년이나 된 나뭇가지에 천 송이 꽃이 피고,

온 세상에 구름이 껴도 한 줄기 달빛 빛나는구나.

 

누각에 오르니 사람이 학을 탄 신선과 같고,

배를 띄우니 말이 하늘을 나는 용과 같구나.

사람은 공자가 아니어도 그 뜻은 똑같고,

만 권의 글을 못 쓰더라도 그 뜻은 능히 웅대하도다.

 

공자가 아니어도, 글을 못 쓴다 할지라도 사람은 누구나 그 뜻이 똑같고 웅대하다.

그 뜻들이 모이고 모여 1894년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항의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에는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가 있었듯이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는 최제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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