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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 맹자

cbc 2023. 5. 29. 00:28

 

촘촘한 신분제의 질곡 속에서 ‘민심은 천심이고 권력의 원천은 백성’이라는 혁명적인 주장을 펼치며 왕도정치를 설파했던 중국의 사상가 맹자. 

 

 만승의 나라에서 그 군주를 시해하는 자는 반드시 천승을 가진 공경의 집안이요, 천승의 나라에서 그 군주를 시해하는 자는 반드시 백승을 가진 대부의 집안이라는 지적에 양혜왕은 소름이 끼쳤을 것이다.

맹자의 지적은 오늘 현대 사회에 대한 예언인 것 같다. “

 

맹자의 농업은 애덤 스미스의 상공업이다.

상공인들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보장하라는 스미스의 자유방임주의는 농민들이 철을 어기지 않도록 잡다한 부역을 시키지 말라는 맹자의 민본주의와 정확히 동일하다.

지금 맹자가 양혜왕의 이익 추구를 비난하고 나선 것은 양혜왕이 필부가 아니고 왕이기 때문이다.

왕은 공인이다. 공동체의 수장이란 말이다.

견리사의(見利思義), 이익을 보면 대의를 생각하라. 당신이 왕이라면 먼저 백성의 평안을 염려해야 하는 것 아닌가?

 

 

 

여민동락과 역성혁명

 

 

《맹자》는 간결하다. 민심이 천심이요, 권력의 원천은 백성에게 있다. 

백성의 생업을 안정시키는 것이 왕도의 시작이요, 환과고독을 돌보는 것은 왕의 의무다.

백성과 함께 울고 백성과 함께 웃는 것이 군주의 길. 백성을 괴롭히는 왕은 이미 왕이 아니다.

하나라의 폭군 걸과 은나라의 폭군 주는 왕이 아니다. 시정잡배에 불과한 일부일 뿐. 갈아치워야 한다.

17세기 영국에 로크가 있었다면 그보다 2000년 앞서 동양에는 맹자가 있었다.

 

 

오륜의 탄생

 

 

인간은 자신의 생존을 사회적 관계를 통해 해결하는 사회적 존재다. 개나 돼지를 사회적 존재라고 하지 않는다. 개나 돼지는 인간처럼 사회적 관계를 구축할 수 없다. 인간의 사회성은 개와 돼지로부터 인간을 구분하는 1차적 표지다.

 

 

성악설(性惡說)은 인간이 본래 악하다고 단정하지만 성선설은 인간이 본래 선했다면서 인간이 악행을 저지르는 것은 잘못된 사회 환경 탓이라고 주장한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타락해버렸는지 돌아보자.

아무리 자주 반성해도 지나침이 없다.

맹자의 오륜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리키는 북두칠성 같은 나침반이다.

 

부자간에는 친함이 있으며, 군신 간에는 의리가 있으며, 부부간에는 분별이 있으며, 장유 간에는 차례가 있으며, 붕우 간에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떠나가는 맹자

 

 

맹자의 스승 공자도 어지간히 돌아다녔다. 

전국시대의 맹자 역시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전국시대의 군주들은 맹자의 왕도정치(王道政治)에 대해 더욱 냉소했을 것이다. 

 

전쟁 같은 경쟁 상황이 맹자의 성선설을 더욱 부정했을 것이다.

오히려 투쟁이 인간의 본성이어서 자연 상태의 인간은 허구한 날 칼을 들고 서로를 죽이기에 여념이 없기에 전제군주에게 강한 권력을 넘겨주고 평화롭게 사는 게 낫다는 홉스의 이론이 왕들에겐 듣기 좋았을 것이다.

보자마자 양혜왕을 묵사발 냈던 맹자의 곧은 기개는 낙락장송이 되어 저 혼자 절벽에서 살아야지, 권력의 저잣거리를 헤매고 다닐 일이 아니었다.

맹자는 사흘을 유숙한 뒤 주 땅을 출발했다. 왕이 자신의 과오를 고치기를 바랐다.

왕이 만일 고친다면 맹자는 발길을 돌렸을 것이다.

주 땅을 나가는데도 왕이 맹자를 만류하러 쫓아오지 않기에 돌아갈 뜻을 거두었다.

맹자의 떠나감은 왕을 버리는 떠남이 아니라 왕을 바로잡기 위한 떠남이었다.

사흘은 왕의 반성과 재고를 위한 뉘우침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왕은 오지 않았다. 떠나는 맹자, 혼자 무어라 했을까?

“덕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德不孤 必有隣).”

 

인생의 세 가지 즐거움

 

 

일은 기쁨의 원천이어야 한다. 직업은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이어야 한다. 직업이 생존의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것이야말로 현대 사회의 비극이다. 21세기의 세계는 이제야 ‘삶의 질’을 찾고 있다. 온 인류가 자신의 활동을 통해 삶의 행복을 누리는 시대가 어서 와야 할 것이다.

맹자는 천하에 세 가지 즐거운 일이 있는데, 왕 노릇 하는 것은 거기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부모님이 살아계시고 형제들이 건강하면 이것이 첫째 즐거움이란다(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참, 쉽다. 그런데 부모님이 살아계셔서 언제라도 뵙고 효도할 수 있는 것이 인생의 첫 번째 즐거움이라는 옛 성현의 말씀은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야 실감하게 된다. 역설적인 진리다.

 

우러러보아서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보아서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란다

 

나의 이익만을 돌보도록 강제하는 사회는 잘못된 사회다.

“불의한 부(富)와 귀(貴)는 나에게 뜬구름”이라고 공자는 가르쳐주었건만 우리는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제 한 몸의 영화(榮華)만을 노리는 무서운 경쟁 사회를 살고 있다.

물질의 풍요는 누리지만 영혼은 공허하다.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得天下英才而敎育之 三樂也).

 

선비들은 어려서 공부하고, 자라서 나라 일을 돌보고, 늙어서 제자들을 키우는 것을 인생의 과업이라고 생각했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보다 공자와 맹자를 더욱 존경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다.

맹자는 젊은이들에게 호연지기를 가르쳤다.

나의 이익보다 모두의 대의를 생각하는 사람, 고통받는 이웃들과 동고동락하는 사람, 상대의 인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이 사는 사람이다.

비록 꽁보리밥에 물을 마실지라도 그의 마음은 태평하다.

일체의 사심이 없어 걸림이 없는 활달한 마음, 호연지기야말로 맹자가 젊은이들에게 준 영혼의 선물일 것이다.

서양의 지식이 사물의 성질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적 지식이라면 동양의 지혜는 인격 수양을 위한 밑거름이다.

호연지기로 가득 찬 젊은이는 누구에게도 굴함이 없다.

맹자는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높은 뜻을 세우고 천하를 유랑했다.

힘 있는 자의 말이 곧 법이던 시대에 인과 예를 논하는 맹자는 현실을 모르는 우매한 책상물림으로 보였을 것이다.

말년에 정치의 꿈을 포기한 그는 공자가 그랬듯이 제자들을 데리고 저술에 힘을 쏟았다.

이렇게 태어난 저서가 《맹자》다. 맹자는 개성이 독특한 사상가였다.

왕에게도 하고 싶은 말을 쏟아놓는 기개 높은 선비였다. 고난에 찬 삶 속에서도 그는 드높은 기상을 잃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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